차창룡,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칼이 되어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칼이 되어
세상 모든 일들을 도막 내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칼이 되어
세상 모든 일들을 채 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칼이 되어
칼바위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칼바위는 까치와 다람쥐를 기르고 있었다
가슴에 소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칼바위는 이름이 칼이었으나
칼이 아니었고 늘 쉬고 있었고
내 마음은 이름이 칼이 아니나
칼이 되어 한시도 쉬지 못하고 칼질을 했다
서정춘, 어항
밤의 하늘에서
내린 하늘이 있어
보름달이 슬그머니
둠벙의 하늘에 들어가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달 속에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피라미떼 놀고 있다
박형준, 옛집으로 가는 꿈
소 잔등에 올라탄 소년이
뿔을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땅거미 지는
들녘
소가 머리를 한번 흔들어
소년을 깨우려 한다
수숫대 끝에 매달린 소 울음소리
어둠이 꽉 찬 들녘이 맑다
마을에 들어서면
소년이 사는 옴팍집은
불빛이 깊다
소는 소년의 숨결에 따라
별들이 뜨고 지는 계절로 들어선다
강인한,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이른 아침 갓 구운 핑크의 냄새
골목길에서 마주친 깜찍하고 상큼한 민트 향은
리본으로 치장한 케이크 상자처럼 궁금한 감정이에요
초보에게 딱 맞는 체리핑크는
오전 열 시에 구워져 나오지요
십대들이 많이 구매하지만 놀라지 마셔요, 때로는
삼사십대 아저씨가 뒷문으로 들어와 찾을 때도 있어요
육질 좋은 선홍색의 연애는
오후 두 시 이후에 뜨거운 오븐을 열고 나와요
구릿빛 그을린 사내가 옆구리에 낀 서핑보드
질척거리는 파도 사이 생크림 같은 흰 거품은 덤이지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 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가장 멋들어진 연애는 한밤의 트라이앵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라지는 삼각관계로 구워내
당신의 눈물에 찍어먹는 간간한 마늘빵 그 맛이지요
김경미, 그 창가
소읍의 맛없는 식당에 앉아 맛없이도 식당을 해야 하는
주인의 속을 생각해본다
식탁 위 때 절은 소금통 같은 유리문 밖 행인들을 본다
마음 같지 않은 날들에 대해 나도 그들만큼 안다
혹은 그들보다 더 잘 안다
슬리퍼에 무릎 나온 추리닝 차림으로 지나가는 청년
내 낯선 행색을 서슴없이 오래 훑어보던 신발가게 주인은
굽 달아난 구두를 잘린 다리 한쪽을 넣어주듯이
검정 비닐봉투에 싸면서 자꾸 나를 의심했다
문을 열자 달력 뒷장에서 잘못 빠져나온 듯 폭설이
다급하게 쏟아졌고
불꽃에라도 데인 듯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보다 더
피할 곳 없던 나는 얇은 옷으로
자연과 시간의 난투극을 피하듯
용건 없는 일정으로 버스 정거장에 섰다
십오 분도 안 되어 그칠 일을 때로는 쏟기도 하는 것
나도 잘 안다
인간이 동물인 건
떠돌아 얻는 답과 머물러 얻는 답이 달라서이겠거니
안심스런 인생을 고르듯 들어와 맛없어도 먹어야하는
저녁 식당도 만나는 법이어서
세상이 미안한 마음 같기만 하지는 않는 것이어서
새 구두는 어김없이 아프고
어느 덧 밤은 솜 뜯긴 소파처럼 옆자리에 와 앉고
창밖 별빛도 나도 뭔가 목이 메는 듯
절룩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