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나면 내주 같은 때 시간을 정하고 나에게 와서 다양한 걸 묻고 답변해가면서 한 번 책을 써보게.
본인이 정리하고 나를 보여주면은 그걸 내가 다시 가다듬으면 되니까. 그렇게 하면 본인도 성장하고, 남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발자국까지 남길 수 있지 않겠나."
문화부 장관, 언론인, 작가, 대학교수, 문학평론가….
직함만 십여 개가 넘는 시대의 석학 이어령 선생께서 나에게 건네신 말씀이다.
그 누가 알았을까.
고작 이십 대 풋내기 프로게이머 출신에 불과한 내가 이어령 선생과 만나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8020의 대화 내용을 담은 책을 써보라는 제안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결코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처음 이어령 선생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 계기, 그의 저서《지의 최전선》.
그 책을 읽고난 후 나는 그의 화려한 언변과 지혜에 놀랐고, 그간 걸어온 길을 보며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1956년 <우상의 파괴>로 문단계의 우상들을 비판하며 데뷔하던 당시 그의 나이, 고작 스물셋.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문단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우물물 파는 사람"이 되겠다던 그의 소신대로 수십 년간 다양한 분야에 새로운 우물들을 미친 듯이 파오셨다.
세계적인 문화 이벤트로 자리매김한 88 올림픽,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디지로그》등 수많은 베스트셀러,
창조학교 설립 등은 전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심지어 여든이 훌쩍 넘으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집필과 후학 양성에 힘 쏟으시며
우물물을 파고 계시는 모습을 바라보면 역시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에게 한순간에 빠져들었고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겠다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워낙 바쁘신 분인 데다 연세까지 많으셔서 건강까지 악화된 탓에 번번이 거절되었던 만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문을 두들겼다. 어떻게든 그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채,
오래전 내가 모 인터뷰에서 밝힌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발언이 절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간이 흐르고 2017년 6월 23일,
나는 이어령 선생께서 한 행사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행사장에 다짜고짜 찾아갔다. 아무런 약속도, 계획도 없이. 그렇게 행사장에 도착했지만 도무지 어쩔 줄 몰라 헤매던 순간 나의 귀를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저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사무국장 윤재환이라고 합니다.”
이어령 선생께서 이사장으로 계신 연구소의 직원이라는 분을 발견한 나는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순간 그는 당황한듯 보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에게 간단히 나를 소개하며 찾아온 이유를 설명드리자 호탕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웃으며) 흥미롭네요. 저는 윤재환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이어령 선생님을 모셔왔습니다. 요새 이런 젊은 친구들이 많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마 이어령 선생께서도 엄청 반가워하실 거 같네요. 제가 이따가 따로 인사시켜 드리겠습니다.”
이어 그는 나에게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알고보니 고맙게도 이어령 선생의 바로 옆자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령 선생께서 도착하셨고, 그는 약속대로 나를 소개시켜주셨다. 간략하게 나의 말을 들으신 이어령 선생은 호탕하게 웃으셨다.
“허허. 재미있군. 그래 자네는 이름이 뭔가?”
"안녕하세요. 저는 황희두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지의 최전선》을 읽고 팬이 되었습니다. 영광입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이어령 선생과의 만남, 그와 나눈 첫 대화. 아쉽지만 행사로 인해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져야만 했다. 며칠 후,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윤재환 사무국장을 찾아간 나는 이런 말씀을 전해 들었다.
"(이어령) 선생께서 자네를 보며 무척 흡족해하셨어. 프로게이머였다는 이야기도 엄청 흥미 있게 들으셨더라고. 선생님께서 자네 같은 청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네."
이후로도 어떻게든 이어령 선생을 다시 만나고 싶었던 나는,
그의 바쁜 일정과 건강 탓에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바로 오늘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나뵐 수 있었다.
사실 오늘도 선생께서 갑작스레 건강이 안 좋아지신 탓에 일정이 밀릴 뻔했지만,
이미 근처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해준 직원분의 도움덕에 잠시나마 만나뵐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건강으로 인해 말을 길게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최근 일도 시작 했고 글을 쓰며 틈틈이 단체 활동을 하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인간은 말이여. 나무 같아서 일정한 곳에 뿌리를 박아야 해. 우리가 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안타까운 건) 우리는 나무가 불쌍하다고 생각해. 도끼로 찍어도 저항도 못하지, 바람에 쓰러지지 이걸 보면서 무력하다고 생각하는데 잘 봐봐. 오히려 나무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을 불쌍하게 봐. 나무는 광합성을 아니까 먹을 거 입을 거 다 있지만, 사람은 살려면 항상 이동을 해야 하지. 그렇지만 나무는 이동하지 않아도 잘만 사니까. 그러니 나무는 인간을 보며 24시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사냐 생각하는 거여. 자연스럽게 꽃이 피면 나무들은 향기도 자연스럽게 풍겨주고……."
이 말씀인 즉슨, 우리 인간도 나무처럼 뿌리를 박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 아닐까. 그 말씀 직후 선생께서는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었기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덧붙이신 걸 보면.
아쉽게 건강상의 문제로 긴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미안한 마음에서였는지 혹은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는지
선생 께서는 《지의 최전선》같은 책을 나에게 직접 써보라고 제안해주셨다.
'20대 청년과 80대 어르신과의 대화'
바쁘고 힘드신데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을 기른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선뜻 어려운 제안을 해주신 이어령 선생. 그를 보며 먼 훗날 나도 그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솟아났다.
만약 내가 어느 순간 그를 만나길 포기했다면 절대 오늘날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거절을 당한다. 다만 그 이후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본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끈질기게 무언가를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바로 오늘의 나처럼.
돌이켜보면 나도 그동안 말도 안 되는 길을 걸어왔다.
프로게이머, 비영리 단체 설립, 다양한 석학들과의 만남….
매 순간이 주위 사람들의 냉소와 비아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믿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지만 반드시 꿈을 달성하겠다는 믿음, 그 하나만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그러니 우리 모두 용기를 잃지 않길 바란다. 비록 보잘것없는 나도 이렇게 하나씩 꿈을 이뤄가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시길. 주위의 냉소 따위는 잠시 잊어버리고.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남은 넬슨 만들라의 명언처럼, 나도 끝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섰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절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넘어지지 않은 법이 아니라 일어서는 법을 배워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연세에도
끝없이 후학을 양성하며 집필까지 게을리하지 않으시는 이어령 선생을 바라보며, 나도 멋진 미래를 그려본다.
먼 훗날 지금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누군가에게 배로 갚는 순간을, 수없이 넘어져도 계속 일어서는 사람들이 결국 꿈을 달성하는 사회를, 나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