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신, 내 이렇게 살다가
내 이렇게 살다가
한여름 밤을 뜨겁게 사랑으로 가득 채우다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설 땐
그냥 무심코 피어날까
저 노을은 그래도 무심코 피어날까
그러면 내 사랑은
무게도 형체도 없는 한 점 빛깔로 남아서
어느 언덕바지에
풀잎을 살리는 연초록이라도 되는가
밤새워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면
우리 엄마는
죽어서 바늘구멍만한 자리라도 차지할까
가을은
수면(睡眠)이 육신 속을 스며들듯
나를, 시들은 잔디 사이
고요한 모랫길로 끄을고 가는데
끄을려 가는 발자국에 진탕물이라도 고여
내가 지나간 표지(表識)라도 되었으면
꽃은 시들어
우리의 기억을 살리는 다리가 되나
땅속에 묻혀 드는
한 가닥 향기로나 남아 있다
살아서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것이 되어
죽어서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서면
가을 밤 하늘에
예사로 하나 별이 돋을까
무심코 별은 빛날까
자크 프레베르, 공원
천년에 또 천년이 걸린다 해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한 순간은
아무리 애써도
말 다 못하지
우주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빛 속 어느 아침의 일이지
한광구, 샘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하늘을 안고
반짝입니다
산이 들어와 흔들립니다
바위가 나무에게
몸을 열어
뿌리내리게 하고
초록 입술로
툭툭
땅의 화두(話頭)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이재무, 수직에 대하여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 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 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랑의 수평도
마음 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서정춘, 잔(盞)
왕은
둥굴고
잔잔한
호숫가로
미희(美姬)들을 불렀다
물의 물빛 물소리로 지저귀라고
지저귀며 물새가 되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