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란, 포도밭에서
네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면
입 안에 가득 고이는
감미로운 후회 같은 것
흑진주, 네 곤혹(困惑)의 눈빛을 피해서
넝쿨 사이로 빠져나오면
짙은 방향(芳香)
어깨 너머로
앵도라진 눈을 모으네
전태련, 조폭이 된 산
어느 날엔가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산의 뺨 위로 반월형 흉터가 생기고
그 위로 길게 칼금이 그어졌다
잘생기고 점잖던 그가 조폭의 얼굴을 하고
창문 밖을 서성인 지 오래
소가 핥은 것 같은 반원형 탈모가 생긴
그 위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딱딱한 시멘트 딱지가 앉았다
그 산이 흉측하게 변한 후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산새소리, 풋풋한 산바람 향내 어디로 가고
매캐한 입 냄새를 풍기며 하루 종일 수다가 줄창이다
어스름에 밀려 한 발짝 물러앉은 저녁 산
밤새도록 누구에게 흠씬 뺨을 맞는지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불빛의 행렬들
물안개 너울로도 잘 가려지지 않는
그 흉터자국
얼굴이 변한 산이 마음까지 변할까
하루에도 수십 번 눈길이 간다
진명주, 화무십일홍
꽃 질 때 떠나 다행이다
꽃 지고 마음 따라 지니 다행이다
한 번도 이 꽃 지지 않을 거란 생각 없었으니
다행이다 다행이다 예감은 언제부턴가 적중했다
꽃망울 가득한 나무 아래서
가고 오지 않는 시간에 대해 얘기하면
잔을 비울 때마다
시야를 가리는 건 화무십일홍
빈 잔 가득 청매화 홍매화 넘쳐난다
꽃 질 줄 알아 다행이다
주구장창 피어나는 이 사무치는 언어들이
팝콘처럼 펑펑 피어나면
감당하기 힘든 일
꽃 지니 좋다
가슴에 품은 나무 한 그루
오늘 꽃 지었으니
새들도 울지 않겠다
고경숙, 탁본
사랑에 눈먼 그가
돌아서서 나를 기다리네
인기척 없이 뒤로 다가가 꼭 안으면
탕탕 솜방망이로 심장을 두드리며
그의 등에 탁본되는 나
심장과 심장
입술과 입술이
이념보다 더 붉게 각인되어
지체된 사랑에 빠진 내가
삶의 제재가 되어버린
그의 시선과 음성을 해독하느라
절반의 몸이
먹물로 흘러내려도 좋으리
내 몸에 꼭 맞는
내 맘에 꼭 맞는
함순례, 일곱 살, 우주(宇宙)
바람이 들썩이는 호숫가
비닐 돗자리 손에 든 아이가
풀밭으로 걸어간다
신발 벗어 한 귀퉁이 두 귀퉁이
메고 온 가방 벗어 세 귀퉁이
마지막 귀퉁이에게 제 몸 내려 놓는다
삼라만상을
돗자리에 전부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