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꾼 악몽은 비슷했다. 깊이 모를 거대한 구덩이가 패여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다. 무슨 이유인지 그 구덩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누군가 등을 떠밀어 그 어둠 속으로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깨어나면 꿈이었다. 때로는 구덩이로 떨어지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또 다른 악몽은 하늘을 날다시피 하는 꿈이었다. 컴퓨터 그래픽 쓰는 요즘 영화들처럼 한번 발을 떼면 지붕 위로 한번에 올라가곤 하는 꿈이다. 이 꿈이 무서웠던 건 발만 뗐다 하면 휙 날아가기 때문에 어디에 착륙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오래된 꿈인데도 워낙 자주 꿨고 그 장면이 선명해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악몽은 뇌에서 보내는 신호가 평범한 꿈보다 강해 훨씬 더 기억이 잘 난다고 한다.
며칠 전 최악의 꿈을 꿨다. 외계인이 침공해 비행체가 하늘을 새카맣게 메웠고 모든 건물이 무너지거나 부서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너지기 직전의 고층빌딩 어딘가에 매달린 채 외계인이 지구를 폭격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외계 비행체는 추석 연휴 첫날 고속도로처럼 하늘에 가득했는데, 천천히 움직이거나 서 있었고 가끔 다른 거대 비행체가 나타나 사정없이 인간들을 공격했다. 어른이 꾼 꿈치고는 너무 유치해서 누구한테 말하기도 민망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꿈이 공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프로이트는 억눌린 욕망이 꿈으로 표출된다고 했고 그것은 대부분 성적 욕망이나 폭력성이라고 했다. 성적 욕망을 외계인 침공으로 표출할 만큼 취향이 과격하지는 않으니 결국 폭력성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떤 잠재적 폭력성이 지구 멸망이라는 황당한 꿈이 되어 나타났는지 궁금하다. 꿈은 또 경험이 기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도 설명된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영화나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최근에 보지도 않았으니 그 해석도 만족스럽지 않다.
꿈자리가 사나워 잠을 깬 김에 현관에 나가 신문을 집어들고 '오늘의 운세' 난을 펼쳤다. 이렇게 써 있었다. "외출시 문 단속 잘하도록." 나 이거야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