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경, 밤기차
갈비뼈를 잃어버린 여자가
영등포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탔다
어깨를 들먹거렸다
차창으로 마스카라가 번졌다
어둠이 번졌다
검은 동공이 출렁거렸다
창에 달라붙은 얼굴이
물고기 비늘처럼 젖어갔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때마다
손가락이 길어졌다
입을 틀어막았다
울음소리는
캄캄한 갈비뼈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아무도 손댈 수 없는
환부(患部)가
물속처럼 환했다
옥경운, 묵혀둔 길을 열고
손을 내미는 것도
그 손을 잡는 것도
길이 된다
그렇게 다가와
말없이 내미는
네 손이 길이 되어
우리는 마침내
서로의 꽃이 된다
옛날의 우리로 다시 돌아가
묵혀둔 길을 열고
김소연, 비밀의 화원
겨울의 혹독함을 잊는 것은 꽃들의 특기
두말없이 피었다가 진다
꽃들을 향해
지난 침묵을 탓하는 이는 없다
못난 사람들이 못난 걱정 앞세우는
못난 계절의 모난 시간
추레한 맨발을 풀밭 위에 꺼내 놓았을 때
추레한 신발은 꽃병이 되었다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꽃들의 특기, 하염없이 교태에 골몰한다
나는 가까스로 침묵한다
지나왔던 지난한 사랑이 잠시 머물렀다 떠날 수 있게
우리에게 똑같은 냄새가 났다
자갈밭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김현주, 즐거운 참깨
깨를 볶는다
가마솥에 깨를 달달 볶는다
화로 위에서 타닥타닥 노랗게 익어가는 생
삶이 뜨거워질수록 멀리 달아나, 멀리 간만큼
되돌아 와서 또 다시 달달 볶이는 생
그녀의 하얀 발목을 뒤집어보면
흰 알갱이로 쏟아지던
그녀의 슬픈 사계가 보인다
타닥타닥, 인생막대기가 때리면 때릴수록
높이 뛰고 높이 뛸수록 멀리 바라보는
허망 속, 푸르른 길이 아득히 저물어 질 때
노을을 뒤집어 쓰고 홀로 울던 타작마당
꽃신 신고 달아나 맨발로 되돌아 와서
타오르는 불꽃, 그 생의 의식 속에서
타닥타닥 바닥을 치며 즐겁게 우는 그녀
어느 한 시절 순탄한 삶이 있겠느냐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아니겠냐
깨우친 만큼 재빨리 되돌아 와서
노릿노릿 익어가는 즐거운 참깨
달달 볶아진 인생에게서는
늘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박후기, 소금쟁이 사랑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소금쟁이처럼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물 위를 걸어다녔지만
당신은 가끔
파문 같은 미소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만나고 싶었기에
나는 젖은 손발 슬그머니
거두어들였습니다
가슴으로 당신을 만나자마자
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