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절정을 위하여
조선낫 날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 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위 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
박남희,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저녁이네
노래인 듯 저녁이네
아침과 저녁 사이가
긴 줄 알았더니
순간이네, 바람인 듯 순간이네
꽃들은 아침에 피어서
저녁을 느끼고
저녁에 피어서 아침을 살아가는데
개미들은 아침을 저녁처럼
저녁을 아침처럼 천천히 기어서
제 집의 마지막 어둠에 이르는데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눈물이네
눈물 글썽이는 웃음이네
웃음과 울음 사이가
먼 줄 알았는데
웃음인 듯 울음이네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그 속에 내가 울고 있네
나인 듯 그대가 웃고 있네
임영석, 선인장
내 발목의 뼈가 삐긋 어긋나
열 몇 대의 침을 맞았는데
화분에 심어진 선인장을 보니
얼마나 뼈가 어긋나 있으면
온몸에 침을 칭칭 맞고 살아갈까
저 선인장 이 세상 고통을 짐지고 꽃이 피니
그 마음 하느님, 아니면 부처님 같다
조인선, 책을 읽다
책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 하나하나 나무에 건다
말라가는 몸속에 가시가 녹아든다
이파리마다 숨는다
찾기가 쉽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지만
언어의 비늘이 의식의 흔들림으로 변하는 건
물고기를 닮았다
행간으로 이어진 그물 사이사이 고개를 내미는
물고기 눈동자가 손맛처럼 느껴질 때 생각이
떠오르는 건
놓치면 커져버릴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렵게 얻은 자식만 귀한가
물고기 하나 싱싱하게 퍼득이면 잠도 안 온다
나무를 보니 그 많던 물고기 어디로 갔나
나이 마흔셋 돌아보니
불타오르던 시절은 가고 누군가 세상은 재만 남았다 한다
물고기 하나 손에 들고 나 서 있다
스스로 눈멀어 딸아이 잠든 줄도 모르고 책 읽어준다
점자처럼 희미한 세상 손끝으로 헤아리니
만져지는 건 거대한 물고기 눈동자를 감싸던
투명한 눈꺼풀이었다
타다 남은 비늘 몇 조각이었다
김유자, 더빙
너의 얼굴이 나타날 때마다
너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너의 입술 위에서 내 입술은 열렸다 닫힌다
너는 언제나 제멋대로 지껄이고
아름답게 웃는다
웃음 뒤에 네 입술은 다시 단정하게 움직이겠지만
맨 처음 너의 말은 텅 빈 그릇에 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된다
나에겐 나의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것
너의 입모양으로부터 나는 태어난다
나는 네가 될수록 좋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로 너를 떠올리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그러나 나와 너의 입술이 어긋날 때
너는 감정을 잃고
유령 같은 얼굴로 거리를 활보한다
지금 나는 너의 거리를 함께 걷고 있다
너는 무슨 말인 듯 할 듯하다
나는 침묵한다
너의 입술에 내가 붙어 있다
바람에 따라 입을 열었다 닫는 나뭇잎에 대해
혹은
나뭇잎 입술을 더듬으며 바람이 말을 옮기는
나무 아래 앉아 나는
한 소리에서 나뭇잎과 바람을 떼어내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