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눈썹
너는 울 때 눈썹을 떨구는군
너는 울 때 추운 눈썹을 가지는군
한기가 느껴지는 가난한 광선
내가 울 때 두고 온 눈썹
내가 울 때 젖을까 심장 속에
두고 온 가난한 눈썹
천양희, 그의 말
산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숲을 말하고
숲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새를 말하고
새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울음에 대해 말하고
울음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물에 대해 말하고
물에 대해 말하다보면
어느새
산 아래 내려와 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나머지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나무들에게 들으시기 바란다
문태준, 대화
새는 가는 나뭇가지 위에
나는 암반 같은 땅바닥 위에
새와 나 사이
찬 공기덩어리가 지나가고
물건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새는 위를 내려 아래로
나는 아래를 들어 위로
가끔 바라보고 있다
새는 울어 쌀알처럼 떨어뜨리고
나는 말꼬리가 어물어물하고
요청이 없지만
아주 처음도 아닌 듯하게
두 줄을 띄워가며 하는
이것도 대화라면
썩 좋은 대화
임동윤, 바람의 강
바람 많은 강을 거슬러온 세월은
죄다 주름이 되었을 것이다
마른번개와 천둥의 밤, 잔가지들이 흔들려
단단한 어깨 축축 늘어졌을 것이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당신
궤도에서 벗어난 종아리마다 실핏줄 툭툭 터져
세계지도를 그렸다
검버섯 환한 팔순의 폐답, 더 이상
펌프질이 필요 없는 삭정이 같은 팔다리
얼굴 가득 인화된 팍팍한 생의 물결무늬
어쩌면 저 문양은 내가 빨아먹고
혹은, 갉아먹다 버린 잎맥인지도 모른다
만지면 금세 풀썩 사라질 것 같은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작달막한 몸과 말라비틀어진 가지
바람 많은 길을 참 많이 걸어와
온통 거미줄 뒤덮인 폐가인데
아직 그 몸에서는
장미꽃보다 더 진한 젖냄새가 난다
푸른빛 남아도는 내 몸에서는
어떤 빛깔의 향기와 무늬도 없는데
바람 많은 강을 거슬러온
그 몸에서는
여전히 나무 타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박남희, 문득
길을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네
길을 끌고 우주 속을 달려가던 태양이 문득 멈출 것 같아
내 발걸음은 다급히 그 한 점으로 달려가네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을 멈추네
생각을 끌고 바다로 달리던 강물이 문득 멈출 것 같아
내 생각은 다시 그 한 점으로 달려가네
어쩌면 꿈틀거리던 내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그 한 점
몇 번이고 잊으려고 해도 자꾸만 나타나던 그 한 점
어쩌면 나를 온통 사랑한 그 한 점이
제 속에 꽃을 숨기고 내게로 달려오는 모양이네
문득 문득 시를 쓸 때도 보이던 그 한 점
잡힐 듯 잘 잡히지 않던 그 한 점
어는 날엔가 회오리바람으로 내 안에 들어
온통 나를 흔들어놓던 그 한 점
내 인생의 쉼표인지 마침표인지
아니면 물음표의 밑점인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던 그 한 점
그 한 점 속에 문득
가물거리던 내 문장이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