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직, 친일의 사냥개(Hound)를 양산하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많이 갔다. 김대중 연대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시간이 곧 친일이 완벽하게 숙주(宿主)를 찾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왜 뉴라이트가 활개를 치게 되었나를 우선 살펴 보자. 안병직. 그를 살펴보지 않으면 현재의 ‘뉴라이트’라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그는 젊은 날에는 좌파성향의 소장학자였다. 80년대 중반 그가 만난 사람이 당시 교토대 경제학과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다. 여기서 그가 내거는 것이 바로 ‘중진자본주의론’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요약하면 ‘아시아 경제는 좌파이론 주장처럼 종속적이거나 반봉건적이 아니라 후발산업국가의 이득을 취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합류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 모토 하나로 안병직은 세칭 ‘낙성대학파’를 결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뛰어든다. 전근대 조선사회에 자본주의 맹아(萌芽)란 존재하지 않았고 개화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야 자본주의가 이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즉, 일본이 조선의 자본주의를 심었다는 것이다. 그는 80년 대 후반 90년대 초반 도요타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이른바 ‘도요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근대조선의 연구’(1989),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1992)이 만들어진다. 이 연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그는 이대근과 결합, 이전까지 없었던 수량경제 관점에서 ‘과학적인 경제사 연구’,’자료를 통한 실증적인 분석’을 표방하며 가치있는 결과물을 냈다고 주장했다. 안병직은 이 연구가 3년 이상, 연구자만 14명 이상 소요되었음에도 “도요타로부터 지원 받은 금액이 300만엔 플러스 100만엔 수준”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는 무척이나 연구의 순수성에 대해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다. 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연구가 있는 것도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 수량경제의 관점에서 적용되고 인용된 통계적 수치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안병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기 시작한다. 정치였다.
안병직, 이병훈, 주익종 등은 이를 정치적 각도에서 해석하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어느 사이 ‘일제의 모든 행위가 당위가 있었다’로 발전하고, 거기서 더 한 걸음을 뻗쳐 ‘현재의 일본이 주장하는 바도 모두 옳다’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순수성은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이 걸음을 본격적으로 정치를 향해 옮기게 된 경로에는 90년 대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개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째, IMF환경이다. 둘째, 김대중시기였다. 1974.10.5 일본 총리부에 법인으로 등록한 도요타 재단은 도요타 자동차 등의 기업부설 법인이라고 볼 수 있다. 순수하게 학문적인 지원을 하는 경우, 국익을 위한 경우 등 다양한 목적성을 띨 수 있다. 안병직이 받았던 주제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였다. 그는 나카무라 사토루의 중진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은 의도적 식민지 시대의 찬양이 개입되어 있다. 즉, ‘경제’라는 요소에 한정해서 일제를 들여다 보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이 가졌던 1930년 대 접근은 결코 근대화에 부합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병직은 마침내 ‘종군위안부도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할 경우,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일단 모든 하부 과정이 종결되어야 하지만 식민시대는 결코 경제적 기반조성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수탈(收奪)이 동반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해방 이후 후발산업국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뉴라이트는 다시 두 가지의 요소를 끌어 들인다. 첫째, 분단의 현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우파’로 정의하면서 ‘좌파’에 대응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해방 이전의 역사보다는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모순이 탄생한다. 안병직의 주장은 학자의 그것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일본기획자의 후원을 받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사회에 각인하기 위한 정치행보에 돌입한다. 그를 따랐던 제자들과 함께 역사학자의 영역인 근현대사를 재단(裁斷)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마침내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는 ‘대안교과서’를 2003년 내놓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논리로부터 출발한다. 중진자본주의론이건 식민지근대화론이건 간에 근현대사의 영역은 경제적 관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에겐 ‘경제라는 잣대’ 이외는 어느 것도 돌볼 필요가 없는 요소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뉴라이트 교과서가 ‘경제발전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역사 해설서’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장이 한국 사회 국가 내부에서 왜 반향을 일으키고 세력화가 되는 것인가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도의 첫 개념이 잘못되어 있었기에, 또 학자 종교인 그룹들이 정치적 행보를 취하는 것이 오래갈 것이라고 보지 않았기에, 더 보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폄하 해버린 것이다. 관건은 이 이론을 정작 현실 정치세력이 받아들여 교묘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IMF 환경은 이 점에서 첫 머리에 꼽아야 할 요소에 해당한다. 대외 채무를 갚지 못해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요청한 IMF 지원은 한국 사회의 고강도 경제개혁 요구를 동반했다. 강제적인 개혁이었기에 사회 곳곳에서 그 동안의 고정관념이 마구 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경제가 발전이 아니라 부도위기를 맞게 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하면서 ‘경제’는 어느 요소보다도 강조되는 테제로 승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배금주의와도 다른 심리구도다. IMF라는 터널을 거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가졌던 최소한 식민지 시대에 대한 분노마저도 슬그머니 희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어찌 되었거나 살아남고 봐야 한다는 생존지향 우선의식이 깊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권 초반기가 넘어가면서 자본시장의 개방 등 세계경제와 연동성이 강하게 부여되어 버렸다. 정권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졌지만 IMF 이후 채택된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은 국민들에게 경제우선주의를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는 중이었다. 물론 정치적 언론도 한 몫을 했다. 정권교체의 당위에서 첫 머리는 항상 ‘경제살리기’라는 주제가 올라왔다. 2004년 11월 초부터 동아일보가 뉴라이트를 ‘운동’으로 부각시켜 대대적인 기획연재물을 게재했다.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11월 23일 신지호의 자유주의 연대가 나오고, 2005년 1월 교과서 포럼, 3월말 뉴라이트 싱크넷, 11월 뉴라이트 전국연합까지 창립된다. 2006년 1월 뉴라이트 교사연합, 4월 뉴라이트 문화체육연합이 그리고 뉴라이트 재단, 6월 기독교 뉴라이트가 구성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본격적인 정치세력화로 간주된다. 즉, 식민지근대화론은 시작이었을 뿐 그 이후 벌어진 것은 모두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일종의 ‘정치적 선전이론’으로 이들 조직들에서 사용되고 그를 통해 연대를 가져간 것이다. 뉴라이트는 한나라당을 포획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형성된 반 노무현 정서를 활용하면서 뉴라이트 이론(이것은 이론이 결코 아니다. 정치적 프로파겐다 수준보다 더 천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법률, 교육 등 전반에 침투시키기 시작한다. 안병직은 과연 이런 작업들이 순수하게 초기의 ‘이론적 힘’만으로 가능했다고 믿는 것일까? 다른 힘이 없이 자체적인 사회 내부의 동력만으로 이런 구성이 가능했다고 믿는 것인가? 일본기획자는 이들을 목적에 활용하는(토끼를 잡는) 충실한 앞잡이 사냥개(Hound)로 활용해 들어갔다. 사냥개는 치밀한 형식을 거쳐 포획되고 양성되었다. 그 사냥개가 또 다른 사냥개를 확산시켰다. 권력, 정치, 이권, 안전 지향자와 회색지대라는 다섯 가지 유형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안병직은 어디에 속하는가? 그는 권력 지향자이며 정치 지향자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그에게는 이제 학자로써의 자격(資格)이 부여되기 보다는 정치 선동자, 나아가 친일부역자라는 명칭이 온전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각기 목적으로 가지고 세력화된 집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뉴라이트 정권이라 해도 좋을 MB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들 내부에서 지분(持分)을 나눠가지듯이 일본기획자도 이들을 통해서 이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근접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도 안병직이 이런 방향을 선택했다면 그는 친일매국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친일의 기계’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