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희, 눈물
고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에 내가 있다
나는 그동안 버려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데리고 살았다
고여 있다는 것은 흘러가고 싶다는 것이고
흘러간다는 것은 고이고 싶다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동안 때 없이 고이고 때 없이 흘러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새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옛 웅덩이에 고여 있던 하늘을 우러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하늘은 금세 흐려져 오래 고여 있던 것들을
지상으로 흘려보냈다 태고 적 나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하늘은 태고 적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내가 거처했던 수많은 집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집들을 함부로 아비라 어미라 부를 수 없다
집은 다만 무언가를 담고 흘려보내는 것일 뿐
고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에 내가 있다
유강희, 어머니 발톱을 깎으며
햇빛도 뱃속까지 환한 봄날
마루에 앉아 어머니 발톱을 깎는다
아기처럼 좋아서
나에게 온전히 발을 맡기고 있는
이 낯선 짐승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싸전다리 남부시장에서
천 원 주고 산 아이들 로봇 신발
구멍 난 그걸 아직도 싣고 다니는
알처럼 쪼그라든 어머니의 작은 발,
그러나
짜개지고, 터지고, 뭉툭해지고, 굽은
발톱들이 너무도 가볍게
툭, 툭, 튀어 멀리 날아갈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봄이라서 더욱 화가 난다
저 왱왱거리는 발톱으로
한평생 새끼들 입에 물어 날랐을
그 뜨건 밥알들 생각하면
그걸 철없이 받아 삼킨 날들 생각하면
남혜숙, 달빛
담벼락에 말라붙은 달팽이 하나
그가 지나온 점액질의 길에
오늘 밤 일찍이 찬 달이 떠오르고
부서질 듯 투명한 달팽이 껍질 위로
막무가내 쏟아지는 달빛 소나기
저 붓다의 계수나무 아래
환한 피륙으로 바래져 가고 있는
한 생의 기나긴 면벽수행
지금 누군가 눈부신 바랑을 지고 있다
차창룡, 태양
한 번도 가까워진 적 없는 사랑이 있다
매일 한 번씩 캄캄해지는 사랑이 있다
이승주, 나무의 말
말에도 체온이 있다
배신이나 음모 술수 보복이라는 말은
비수처럼 서늘하고 차갑지만
배려 나눔이라는 말은
봄볕처럼
우리의 마음을 따듯하게 덥혀 준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설렘의
첫 온기(溫氣)가 있다
새봄에 나무들은
아마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
벚나무 모과나무가 묵은 껍질을 뚫고
연한 잎촉을 밀어내는 것은
사랑한다는
나무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