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 자정에 일어나 앉으며
폭풍 몰아치는 밤
빼꼼히 열린 문이 꽝 하고 닫힐 때
느낄 수 있다
죽은 사람들도 매일밤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걸
내 흘러간 사랑도 그러할 것이다
이상국, 그늘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새들도 갈 데가 있어 가지를 떠나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
문정희, 흙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 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라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지유, 데칼코마니
뭉그러져야
완성되는 그림
형체도 없이
짓이길 때
비로소 만나는
늘 처음 보는
나비, 데칼코마니
끈적이는 우연이
달라붙어
양쪽 날개는 찢기고
지루한 연애가
몸을 바꿔 오는 시간
펼쳐지는 것이
나비만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짓누를수록
기억은 더 푸르게 날아
지독한 사랑을
하지, 베테랑처럼
김선우, 여울목
무릉계에 와서 알았네
물에도 뼈가 있음을
파인 돌이 이끼 핀 돌 안아주고자 하는 마음
큰 돌이 작은 돌에게 건너가고자 하는 마음이
안타까워 물은 슬쩍 제 몸을 휘네
튕겨오르는 물방울
돌의 이마 붉어지네 물 주름지네
주름 위에 주름이 겹쳐지면서
아하, 저 물소리
내 몸에서 나던 바로 그 소리
나 그대에게 기울어가는 것은
뼛속까지 몽땅 휘어지는 일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