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룡, 벼랑 위의 사랑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거주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야윈 상록수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나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여,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졌고
세상은 우리를 받쳐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는구나
버릇처럼 벼랑 위로 돌아왔지만 보이지 않게 무너지는 법
평생 벼랑에서 살 수는 없어, 당신은 내 마음을 떠나고 있었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지는 법인지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내 마음은 항상 낭떠러지였다, 어차피 죽을 용기도 없는 것들아
벼랑은 암시랑도 않다는 표정으로 다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수익, 선택
과녁을 향하여 정조준을 끝낸 화살을 띄운다
마지막-이라는, 필생의 한 판 승부를 위하여
저 먼 하늘 끝으로 시위를 날린다
날아가는 일은 지금의 운명
포기할 수 없는 힘에 갇힌 중력으로
한번 거칠게 부딪쳐 보자는 듯
더 높이 떠오르는 일의 불굴의 욕망만으로
그의 입은 가득해진다
마침내, 떨어져 내려야 할 충격적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면서
불의 주둥이에 갇힌 크나큰 고통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끌어당기는 하강의 속도로 파르르 떨리면서
한 순간에 힘을 쏟아야 할 시점에 이르러
그것은 폭풍 같은 명중으로
가슴을 치면서 우뚝 서 있거나
또는 어처구니없이 텅 빈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의
그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므로
오, 마지막 선택은 시작된다
김형영, 따뜻한 봄날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버리더니
한웅큼 한웅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이경림, 밤길
맞은편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그대 눈빛이
너무 환하다
중앙선이 보이지 않는다
유안진, 빨래꽃
이 마을도 비었습니다
국도에서 지방도로 접어들어도 호젓하지 않았습니다
폐교된 분교를 지나도 빈 마을이 띄엄띄엄 추웠습니다
그러다가 빨래 널린 어느 집은 생가보다 반가웠습니다
빨랫줄에 줄 타던 옷가지들이 담 너머로 윙크했습니다
초겨울 다저녁 때에도 초봄처럼 따뜻했습니다
꽃보다 꽃다운 빨래꽃이었습니다
꽃보다 향기로운 사람 냄새가 풍겼습니다
어디선가 금방 개 짖는 소리도 들린 듯했습니다
온 마을이 꽃밭이었습니다
골목길에 설핏 빨래 입은 사람들은 더욱 꽃이었습니다
사람보다 기막힌 꽃이 어디 또 있습니까
지나와 놓고도 목고개는 자꾸만 뒤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