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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얼굴 (BGM)
게시물ID :
panic_7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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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
추천 :
20
조회수 :
4221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4/07/28 06:08:36
BGM정보 : 브금저장소 -
"저 이상한 사람 아니구요..."
사람들이 어깨너머로 스쳐 지나간다.
이제 막 이어폰을 귀에서 꺼내고 그에게 들은 첫마디가,
저.이.상.한.사.람.아.니.구.요. 라니...
'그 말부터가 이상해.'
그리고 이상한 사람치고 멀쩡해서 이상해.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요란스레 나를 피해 다닌다.
버젓이 길 막고 선 사람치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어쩔 줄을 모른다.
지하철역에선 이제 막 사람들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인파를 어설프게 막아선 채 쭈뼛대는 그와 나를 경계로
사람들은 홍해처럼 갈라진다.
길을 막아선 우리에게 들리는 건 약간의 조소, 그리고 조소를 닮아있는 코웃음들.
가슴과 볼 언저리가 화끈거렸다.
이 갈라진 홍해 같은 인파 속에서 길을 막은 남자.
그 제지를 받은 나.
마치...
이건 마치...
쑥스럽잖아.
뭐야...
창피하게...
그가 말했다.
"저기요... 아... 일단은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늘이 7월 18일이잖아요? 저번 주
수요일이 9일이었죠?"
응?
전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말들이 무엇을 근거로 시작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저번 주 수요일이 9일 이었죤 왜 묻는 거에요?
그 물음 대신해 나는 단발의 의문을 던졌다.
의식 못 한 채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터졌다.
"네?"
이건 일종의 밑밥 같은 건가?
하지만 너무 생뚱맞은 건 아닌가?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발걸음을 잡히며 일순 느꼈던 야릇한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내 표정을 읽으려는 듯 눈동자를 재빨리 굴려가며 나를 훑었다.
어찌 보면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저기 저 아저씨 보이시죠? 안경 쓰신 분, 횡단보도 앞에요.
어... 어.... 그.... 어.... 그러니까... 오늘이 18일이고, 저번 월요일이 7일... 그러니까..."
미친 사람?
멀쩡하게 미친 사람?
날짜 마니아?
나 그냥 미친 사람한테 당첨된 거야?
허탈한 마음이 없던 설움을 동반했다.
아직도 에스컬레이터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우릴 힐끔거리고 있었다.
'무슨 기대를 했을까...'
선한 인상의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끔하게 정돈 된 선량한 청년.
하늘색 셔츠가, 구김 없는 갈색 면바지가,
부스스하지 않은 단정한 머리가,
막연한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요즘은 이런 멀쩡한 사람들이 더 삐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이란 게 뭔지...
그저 조용히 그를 등지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쥐었던 이어폰을 왼쪽 귀에 하나 걸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일곱 번째에요! 오늘이 저 아저씨를 일곱 번 째 보는 거에요.
잠깐만요. 죄송해요. 아! 가지 말아주세요.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진짜 저, 아..."
횡단보도의 아저씨가 유유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아저씨가 가로수에 섞여 시야에 사라지고,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생겨서 하는 짓이라곤...
잠깐 마음에 그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슬슬 머릿속에 그려지자
동시에 가슴에서 끓어오는 분노도 함께 베어 나오고 있었다.
신경질이 넘쳐,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제가 만만해요?"
그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처음으로 나를 즉시했다.
날 즉시했던 눈동자는 곧 잔물결을 일으키는 물고기 떼처럼 급하게 흩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출렁이듯 보인다.
"아니요. 만만하고 그런 게..."
"뭐 역문을 들어봐라, 도를 믿냐,
내가 선하게 생겼다. 그런 말 하고 싶은 거죠? 지금.
뭐에요? 뭐 피라미드 권유 그런 거 하고 싶어요?"
"아니에요. 저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니에요. 전... 저는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가는 사람 붙잡고 뭐하시는 거에요 그럼.
진짜... 오늘이 18일이네 저번 주 수요일이 며칠이네..."
희한하게도 내가 쏘아붙이기 시작하자, 되려 그는 조급함이 씻겨 나가는지 평온을 찾
아갔다.
허둥데던 모습이 정체하기 시작하며, 쉴 세 없이 굴러다니던 눈동자도 슬슬 저기 땅바
닥 어딘가를 향해 초점이 모여간다.
옆에서 빤히 구경하는 여고생들이 성가시다.
망신을 당해도 이런 개망신은 다신 없을 것 같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여고생들 눈에는
내가 길만 걸어다녀도 남자들이 전화번호를 얻기 위해 애걸하는,
그런 매력있는 여자로 보였겠지...
창피해.
그에게 제지받고 화끈거렸던 내가 창피해.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도,
생뚱맞은 소리 듣고 실망하는 것도,
창피해.
그에게 대꾸를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처음부터 멈춰 서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그를 무시한 채 걸었다.
그리고 댓 발짝이나 땠을까.
그는 별안간 달려들어 내 팔을 낚아채곤 한쪽 이어폰을 거칠게 뽑아냈다.
그 모습에 여고생들은 신음을 토했다.
'이 짓이 멋있어? 그래 보여?'
싸구려 3류 드라마도 막상 눈앞에서 펼쳐지니 구경할 만 할지도 모르겠다.
이 거리에서, 여고생들에게 과연 대사는 잘 들리고 있을까?
귀가 쓰리다...
팔목도.
남자는 표정을 굳히고 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라는 말이 입술을 맴돌았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곤, 다시 눈길을 피하곤 하며 말했다.
"끝까지 듣고, 그래도 그냥 제가 미친놈 같으면 가세요.
안 말릴게요. 나 아가씨한테 뭐 팔려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피라미드 그런... 뭐 그런
...
도를 믿니 그런것도 아니고, 제가... 저도 제가 이해하기 힘든 사람인 거 잘 아는데요.
그래서 처음에 좀 횡설수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만 끝까지 들어봐요...
어려워요?"
어려워요?
묻고,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신 난 건 여고생들뿐이었다.
웬 남자가 길 한복판에서 여자 팔을 휘어잡았다.
심지어 거칠게 이어폰을 뽑는 행패까지 부렸다.
그 광경을 보고도 사람들은 내게 관심 한 방울조차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뿌리치고 갈 만큼 용기가 들지 않는다.
뿌리치려 든다면 이 미친놈이 정말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광경마저 그저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차마...
그는 우릴 구경하는 여고생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 기 왼쪽에 단발머리 여고생. 저 여고생.
제가 저 학생을 68번 봤거든요?
오늘까지 포함하면 69번이에요."
희한한 말을 그는 심각히 말해왔다. 여고생? 을 69번 봤다고?...
여고생, 69, 그 두 단어를 그의 입에서 듣자, 그가 아주 중증인 변태 같다는 느낌이 든
다.
"학생이라서 등굣길 아침이면, 저랑 출근길에 자주 마주쳐요.
오늘처럼 오후에 마주치는 건 오늘을 포함하면 세 번밖에 되지 않아요..."
그는 내 눈을 읽으려는 듯 재빠르게 나를 돌아봤다.
왼쪽 눈, 오른쪽 눈...
내 눈이 퀘스천마크를 그리고있었을까?
시선을 빨리 전환한 그는 조바심을 내며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은근 발을 구르려는듯 안절부절한 모습이, 날 긴장하게 한다.
갑자기 폭발하는 거 아니야?
누가 좀...
구경만 하지 말고...
"저기 나무 옆에 서계신 할머니. 보여요?
저기... 저, 저... 저 할머니는 오늘로 마흔두 번째 보는 거에요.
저쪽 역 너머 길가에서 나물 파는 할머닌데,
제가 얼마 전에 역 앞으로 자주 다니면서 꽤 자주 지나쳤어요.
어... 어... 그... 스! 앞치마! 요. 야채 팔때는요. 맨날 보라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고요.
앞치마에 주머니가 지갑처럼 쓰여요. 왼쪽이 동전, 오른쪽이 지폐. 그렇게요.
어... 그리고... 손녀가 가끔씩 들려요. 아직 학생인데, 뭐랄까.
할머니 심심할까봐 들렸다는 느낌이라고 설명해야하나... 뭐라고... 아...
저기! 저기! 머리 노란 아가씨. 저분은 두 번째 보는 거에요.
한 달, 정확히는 저번 달 17일에 번화가에서 스치고 오늘이 두 번째에요.
역 앞 번화가에 새로운 주점이 오픈하는 날이었는데,
친구들이랑 옹기종기 들떠있었어요. 주점 오픈도 행사랍시고
사람들이 줄을 서면서 입장했었는데, 어... 아...
아가씨 옆에 있는 남자, 저 사람은 71번째에요.
저 남자는 이 근처에 살아서 자주 보는 편이에요.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너무 횡설수설하죠? 다시요... 다시..."
뭘 알겠어?
그런 소릴 듣고 뭘 알겠어?
도대체 무슨 소릴하는 지, 내가 그런 소릴 듣고.
그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아니면 자기 자신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하는 지 모르겠어요?
저, 여기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는 사람 중에 처음 보는 사람은... ... 둘 셋... 다섯 명 밖
에 없어요.
누구든 손으로 가리켜봐요. 언제 어디에서 마지막으로 봤었는지 말해드릴게요. 네?"
... ... ...처음 보는 사람이 다섯 명 밖에 없어?
"처음 보는 사람이 다섯 명 밖에 없는 줄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물었다.
그는 실마리를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셀쭉 올렸다.
멀쩡하게 미친사람치곤 굉장히 순수한 웃음이다.
"다 기억하니까요. 이해가 가요? 다 기억해요. 전부다."
나는 토스트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 아주머닌 몇 번 보는 거에요?"
"522번. 오늘 본 것도 포함해서요. 출근하는 날이면 매일 봐요. 출근, 퇴근, 하루에 두
번씩 본 것도 전부 포함이에요."
그냥 아무 숫자나 둘러댄다고 해도, 어차피 나는 알 수 없다.
흥미로운 그의 이야기가 어디로 튀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제 그냥 좀 놔줄 수 없을까?
"그쪽을 마지막으로 본 건 7월 13일이에요. 일요일."
일요일? 나를 일요일날 보기는 힘들었을 텐데?
"어디서요. 어디서 봤는데요."
생각할 틈을 주고싶지 않았다.
쏜살같이 쏴붙이면 또다시 어버버 말을 더듬다 나가 떨어지겠지.
"구청 앞에서요."
"예?"
"구청 앞에서요. 구청 길 건너 커피숍에 앉아있는 거 봤어요. 어떤 여자분이랑 계시는
거요."
일요일날 친구를 만난 것,
친구와 쇼핑하다 구청 앞 커피숍에서 시간을 때웠던 것.
어떻게 알아? 어떻게 봤어?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봤는데요? 어떻게 봤어요."
미친 새끼다...
진짜 미친 새끼다...
좇아다녔다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거잖아.
"버스타고 가는 길에 얼핏 봤어요. 22번 버스... 구청 앞으로 다니는 거 아세요?"
얼핏?
거짓말.
"얼핏 보고 어떻게 기억해요?..."
"저는 기억해요..."
"그럼 그 전에는요. 그 전엔 언제 봤어요?"
당신 그냥 스토커 아니야?
"11일에 봤어요. 금요일날 출근길에...
당고개 방면으로 가시죠? 저는 오이도로 가는 길이라...
플랫폼 건너로 봤어요. 아침 7시 14분이었고... 또..."
또?
"또... 오늘이랑 같은 청바지 입으셨던 거 같네요."
오늘이랑 같은 청바지? 입었었나?... 기억이 나질 않아.
아침 7시 즈음해서 지하철을 타는 건 매번 비슷하고...
그와 나 사이에 뜨거운지 냉랭한지 알 수 없는 미적지근한 공기가 넘실댔다.
그의 말에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걸 은근히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잠잠히 입을 닫고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정말 그날도 이 청바지를 입었던가?
아니... 입었건 안 입었건 그건 둘 째치고... 나를...
"아가씨 도와드려요?"
불쑥, 하고 구조의 손을 내밀어 온 건, 눈매가 날카로운 아주머니였다.
말투만은 포근한 듯한 아주머니는 가히 눈매로 내 앞의 남자를 도륙할 작정인 듯 싶었
다.
네! 도와주세요! 이 사람 미친 사람이에요! 저 집에 가고 싶어요!
하소연이 쏫아지려는 순간, 그가 아주머니에게 변명을 늘어놨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 어... 아... 아, 아가씨가 갑자기 안 보여서,
걱정되서, 정말 걱정되서 이런거에요. 불쾌했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 저, 가라면 갈게요. 저 정말 가라면 그냥 갈게요. 불편하게 안 할게요. 정말요."
아주머니의 안광에 불길이 번졌다.
아주머니의 고함이 거리에 뜨거운 정적을 부른다.
"가긴 어딜가! 지금 다큰 처녀한테 행패부리고 그냥 내빼겠다고? 이 냥반이 근데!"
정적의 빈틈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시선이 모이자 그의 눈동자는 전보다도 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저... 저...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정말... 아... 정말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 사람들 다봤어! 이 싸람이...
어디서 행패야 행패가! 너 같은 놈들 한둘 상대해본 줄 알어?
너는! 너는 약도 없어. 아가씨, 경찰불러 경찰! 응? 아가씨... 아이구... 아가씨 괜찮아?"
아주머니의 팔이 슬금슬금 어깨를 감아왔다.
이상하게도 아주머니의 은근한 온기가 기분이 나쁘게만 느껴진다.
걱정해? 내가 안 보여서 걱정했다고 했어? 당신이 날 왜 걱정해?
당신은 매번 이런식으로 며칠 안 보였던 사람들보면 붙들고 걱정해줘?
...며칠 안 보이는 사람?
그는 차츰, 그리고 조용히 눈시울을 붉게 물들여갔다.
그리곤 이내 포기라도 했다는 듯 눈을 슬머시 감았다.
그의 표정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애매하다.
정말로... 날 걱정했어?
내가 사라진 걸 어떻게 알았어?
아주머니의 고함이 톡톡히 효과를 봤다는 듯,
어깨가 쩍 벌어진 남자가 둘 성큼성큼 아주머니 뒤로 다가왔다.
이런 분위기라면 삼삼오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올 기세였다.
동그랗게 인간 벽 콜로세움이 형성되는 게 눈에 선하다.
그는 모두 체념한 듯, 그저 자리에 멍청히 서버렸다.
이상해...
모든 게 다 이상해...
그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꼭 이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얼굴이.
"아가씨 도와드려요?"
덩치가 남산만한 남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어깨와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근육들이 시각적 효과만으로 위협적이었다.
그는 덩치의 남성들을 슬쩍 올려보곤 조용히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말해?
왜, 표정이 그렇게 우울해요?
"뭐?"
다른 한 덩치가 따지듯 소리쳤다.
그는 다른 변명을 하지도, 아까처럼 그저 가겠다고도, 말하지 않고 담담히 다시 말했다
.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저 남자가 이 아가씨를 막 이렇게 막 팔 붙들고 늘어트리고,
말두마 총각. 귀에 저거, 뭐시기, 아가씨 이어폰 끼고 있는걸 그냥 막! 쥐어뜯고.
도와줘요. 저 개 같은 새끼. 다시는 이런 짓 못하게 해야지....
어디를 벌건 대낮에... 어휴! 세상 흉흉해서 원..."
아주머니가 덩치들에게 신랄한 고자질을 늘어놓는 동안,
이상하게도 점점 진로가 잘못 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예감이 들었다.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이는 순간,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육중한 덩치의 팔근육이 내 시야에서 잔상처럼 스치며 미세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얼굴이 덩치의 손바닥에 의해서 급격히 튕겨나가는 것을 보며,
이제는 분명 이 것이 잘못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쩍, 하고 달라붙는 살소리가,
그의 뺨이아니라 내 등짝에 내려 쳐진듯 쓰렸다.
여고생들의 비명이 터진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360도 선회를 즐기듯.
휘청했던 그는 얻어 맞은 뺨이 저린지 금방 왼쪽 눈을 떨었다.
그리곤 얼마든 더 달게 맞겠다는 듯
그는 우직히 자리에 섰다.
덩치들의 거친 욕설이 거리를 흥분으로 물들여갔다.
관중들은 그 모습마저 묵묵히, 그리고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의식이었다. 그가 맞는 순간 느낀 정체불명의 죄의식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다.
덩치의 묵직한 한 방이 더 날아가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감쌌다.
"때리지 마세요!"
설명하려고 했었어.
설명 참 더럽게 못하지만, 뭔가 설명하려고 했어.
아줌마가 방해한거야.
아줌마가 방해하려고 한 거 아닌데, 방해했어.
도저히 거짓말이 아닌 것 같잖아.
뭐야. 왜 도망도 안 치고, 왜 병신같이 얻어맞고 서있어.
엉겁결에 얼싸 안 게 된 그와 나를 바라보는 눈들이 따갑게 느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하얗게 새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시선이 너무 많다.
아무거든, 뭐든 전져야했다.
"왜 사람을 때리고 난리에요?!"
소리를 쳤다.
덩치와 아주머니의 표정이 삽시간에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아주머니 눌매의 칼날이 나를 향해왔다.
"아니 이 아가씨가 기껏 도와주려는 사람들한테!"
"도와주긴 뭘 도와요! 아줌마 나 알아요?"
따갑다.
양심이 따끔거린다.
길가 하수구에 머리를 처박고만 싶다. 창피하고 원통하다.
그러게 왜 다짜고짜 사람은 때리고 그래.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호소하고 있었잖아.
나는... 나는 그래도 끝까지 말은 들어보려고...
그러려고...
아아, 시간을 되돌려서 그냥 가만히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럼 아주머니나 덩치들에게 이렇게 미안하진 않았을 건데...
아주머니에게 등을 돌리며 그를 돌아보니, 뻘건 왼 뺨에 하얀 손자국이 부풀고 있다.
그 것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내 입안에 피의 비린 맛이 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괜찮아요?"
물으니 그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미미하게 떨리는 밑의 입술이, 안 괜찮다고 말하고있다.
뺨을 맞은 왼쪽 눈이 빨갛게 충혈되 있었다.
곧 충혈 된 눈에서 슬쩍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뺨을 맞은 고통으로 자연히 흐르는 건지,
아까부터 참았던 눈물을 이제야 터트리는 지,
알 수가 없다.
"미친년. 지도 마음 있었네."
덩치가 나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라는 말이 나오려다 삼켜졌다.
삼켜진 말이 가슴에 몽아리졌다. 뜨거운 쇠구슬마냥.
나 도와주려던 사람들인데...
라는 생각이 그나마 나를 달래고있었다.
그는 덩치들과 아주머니는 보이지도 않는 다는 듯 물었다.
"다시 설명 들어줄래요? 이번엔 똑바로 설명 할게요. 아니, 아까보단 잘 할게요."
대답을 하기엔 면목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엔.
줄행랑을 친다는 것이 이런 걸까.
불륜 커플이 모텔에서 나오는 길을 촬영 당하는 느낌이 이런 건가...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내 잘못이 있었나?
덩치들이 그를 때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미안하진 않았을 거다.
그는 놀랍게도 몇 걸음 가지도 않고 멈춰섰다.
자리를 피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듯,
역 앞에 있는 벤치에 가선 말 없이 앉아버렸다.
내가 부탁해야하는 상활이 올 줄은 정말이지.
"더 멀리 가면 안 되요?"
그는 주변 허공에 눈치를 탐색하듯 눈을 돌리다가 물었다.
"더 가다보면 인적 드물어서 불안하실가봐..."
할 말이 없다.
그저 그가 순수한 의도로 나를 걱정한 다는 걸
받아드리는 것 외에는 이제 그를 당할 길이 없는 것 같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더 멀리가요. 아까 아주머니도 아직 저기 있고... 제가 창피해서 그래요."
복잡해진 표정의 그는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곤,
"그래요 그럼." 했다.
그리고 정말 묘하게도,
그와 나란히 인도를 걸었다.
아까 역에서 우리를 본 사람이
지금 우리 둘의 모습을 본다면,
나를 어떤 여자로 볼지...
머리가 복잡했다.
쓸데없는 생각들로만 가득히.
지금 이 짧은 시간에 무슨 놈의 봉변중에 웬놈의 봉변을 당한건지.
한참을 말없이 걷다보니,
차동차들 싱싱 달리는 소리가 리듬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길 한 복판에서 그는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곤 말했다.
"어디 앉을 데라도 찾으려고 했는데, 잘 없네요."
"앉아서 해야되요?"
그는 어깨를 꺼트리며 짧은 한숨을 쉬곤 물었다.
"저 바보같죠?..."
네... 그리고 살짝 미친 것 같기도 해요, 를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눈알만 굴렸다.
"제가요... 한 번 얼굴을 본 사람은 잊질 못해요."
그걸 증명하고 싶었나?
그래서 누굴 몇십 번 봤다고 그렇게 허둥지둥...
"여행... 갔던 거에요?"
그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그와 눈이 마주치자,
걱정. 그 두 글자가 머리에 박히는 것 같다.
"아니요. 출장이요."
"아아..."
침묵이 찾아왔다.
어깨가 묵직해질 만큼, 가슴이 답답해질 만큼의 침묵.
별일이었다.
우리 엄마도 안는 걱정을,
생판 남에게 받고 앉아서.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사람을 오늘 처음 봤을까?
자연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게 되었다.
처음은 아닌 것도 같고.
그가 물었다.
"제 말 믿으세요?"
"얼굴 못 있는 다는 말씀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죠?"
"...그렇죠."
허탈한 웃음을 흘린 그는 생각에 잠기든 하늘을 째려보다가,
결심을 굳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럼 믿는 건 둘 째치고, 얼굴을 못있는 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진 아시겠죠?"
"몇 번 보고, 언제 보고, 그런 걸 다 기억해요? 정말로?"
그가 작은 끄덕임은 연신해왔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게 사실이라고 치고... 제 걱정은 왜 했어요?"
"갑자기 안 보여서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니 질문의 의미가 간단히 퇴색되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요. 얼굴을 그렇게 다 기억하신다면, 저 말고도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은
얼마든 있을 거 아니에요.
토스트 가게 아줌마가 안 보였던 다음 날 찾아가선, 어제 왜 안 보였어요? 안부 물으세
요? 그 할머니나, 횡단보도 아저씨나,
그 여고생...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일일이 그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이사를 갔는지
, 죽었는지, 뭐 어쨌는지 모르잖아요?"
그는 끄덕임과 동시에 "그렇죠."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왜 내 걱정은 왜 하세요?"
그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시선이 저 멀리 도망친 것 처럼 느껴진다.
눈 안에 가득한 것이, 아직도 잔여물이 남은 걱정인지, 전혀 다른 근심인지 모르겠다.
그가 멀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가 사람 얼굴마다 기억하다는 말... 그런 거 보다 훨씬 황당할 수 있는데...
저는 그... 쪽? 분이 걱정 되니까, 그저 말씀이라도 전할게요. 좀 길지도 몰라요."
해가 기울고 있었다.
어둑해진 초밤에 조명불들이 부산해 보였다.
그는 침을 한 범 크게 삼키고 이야기했다.
"갑자기 사라졌던 분들이 몇 분 있으세요. 정확히는 네 분이신데...
그냥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기엔 분명 이상한 점이 있었거든요.
그쪽 말씀대로, 모르는 일이지만요. 이사를 갔는지,
정말 사고로 죽었는지 병원에 입원을 했는지,
또... 출장을 떠났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상했어요."
"뭐가요?"
"제가 사람을 본 횟수를 기억하잖아요?"
"네."
"누군가를 본 횟수가, 다른 누군가와 똑같이 올라간다고 하면... 말이 어려울까요?"
"..."
"쉽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A라는 사람을 오늘 두 번 봤다면, B라는 사람도 오늘 꼭,
두 번을 보는 거에요."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 이야기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남자는 계속해서 이야기 해나갔다.
"A와 B가 친구사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수 있죠. 등교를 같이하는 사이라던가,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침마다 행선지랑 시간이 매번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데요."
그런데요...
잘 모르겠으면서도 그가 날 걱정하는
이유가 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그냥 정말 쉽게 말하자면...
"그렇게 꼭 붙어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횟수가 올라가는 일은 정말이지... 없거든요...
제 경험에 한해서는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누가 나 좇아다니고 있다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의 말을 가로 막고나니,
그는 이상하게도, 안도하듯 웃어버렸다.
그리곤 "네 맞아요." 했다.
"솔직히 못 믿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분이 모두 여자였어요. 가장 처음에 이런 현상을 목격했을 땐,
그저 신기하다. 그렇게만 여겼었죠. 무슨 운명이란 게 정말 있는 건가? 하는 그런 느낌
으로.
그리고 첫 번째 그 여성분이 사라졌을 땐, 위화감 같은 건 없었어요.
누가 언제부터 안 보인다고 그걸 알아 차릴 순 없는 거니까요.
수 많은 얼굴을 매일 떠올리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그냥 눈 앞에 보이면 봤던 얼굴을
기억하는 것 뿐이라...
두 번째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서야, 그제서야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어요.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금...
그게 내 상황이라고?
그렇다고 말하는 건가?
그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가려 했지만,
당장 결론부터 듣고 싶었다.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혹시나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사라졌다는 게... 살해당했을 거란 이야기죠?
그런거에요? 그래서 나 걱정했어요? 그 사람 어디에 있어요?
오늘 나 봤으니까, 그 사람도 봤을 거 아니에요. 그죠?
나 지금 위험해요? 나... 나... 그... 도망가야되요? 경찰에 신고할까요?"
내가 이성의 끊이 느슨해지자,
그도 덩달아 눈동자를 흐렸다.
그는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 허... 그... 이번이 처음이에요."
"예?"
"제 말을 믿어 준 사람이 그쪽이 처음이에요."
"그럼..."
"세 번째로 이런 일이 있었을 땐, 정말 그냥 무시만 당했어요.
어디서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제 이상한 강박증을 어떻게 설명할지도 모르겠고...
네 번째 여자분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셔서...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누구라도 불러야한다고 설명도 해봤는데,
제 말씀이... 그저 미친 소리만 같았나봐요. 제가 잘 설명했더라면, 어쩌면 다시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이 상황을 즉시하고 계신 건 그쪽이 처음인
거에요..."
누구라도...
불러야...
부산에 살고 있는 엄마를 부를까?
이 시간에?
불렀다고, 그래서 왔다고, 하면 시간이...
직장 사람?
아니...
날 도와줄 직장 동료가 있나?
평소에 은근히 성희롱을 해대는 최 대리의 얼굴이 스쳤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털어내며 최 대리를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나머지는 다들 여자이고...
아는 남자가...
이 타지에서 아는 남자가...
그가 말했다.
"남자 친구라도 부르세요."
없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경찰한테 신고해야겠어요. 그럼 도와주겠죠? 그죠?"
그는 얼굴이 어둡게 가라 앉히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사실 네 번째, 이 일이 있을 때, 제가 신고를 했었어요.
여자분이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군지 모르는 남자가 여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또..."
"또 뭐요?"
"그 사람이 이 여성을 좇아다니는 모습을 43번 봤다고..."
43...44.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완전히 처음인 거에요. 만약 제 말씀을 믿고 계시다면,
만약 제가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한다는 그런 사실까지 믿으신다면,
그쪽이 제일 처음으로 제 말을 믿어주는 거에요. 제 인생을 통틀어서."
"44번... 만나면요?"
그는 고갤 흔들었다.
"43번 만나는 모습이 항상 마지막이었어요."
그의 말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 질문이 머릴 내려 치는 것 같았다.
마치 내 스스로 나의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것처럼.
... 그럼...
... 그럼 나는 지금...
"몇 번이에요?"
"..."
"나는 그 사람이랑 몇 번 마주친거에요?"
그는 다른 말로 대답을 미뤘다.
"누구라도... 지금 부르면 안 되요? 일단 경찰이라도. 아무라도."
"지금이 43번 째죠? 그죠?"
그가 가만히 눈을 떨궜다.
셀 수 없이 많은 얼굴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정확히 43번만 스친 사람.
미치광이.
"부모님에게라도..."
"없어요."
"네?"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구요..."
친구를 부를 순 없었다.
여자끼리만 있는 다는 것이,
오히려 나로인해 친구까지 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 다시 역 앞에 번화가로 가요."
머리가 멍해진다.
피가 안 도는 느낌이다.
시야게 검게 멀어지는 듯 하다.
"사람 많은 곳으로 가면, 그래도 어떻게 하진 못하게죠."
그의 손에 이끌려 역으로 몇 걸을 되돌아 가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새벽에는 아무리 거기라도 사람 없잖아요."
"... 저라도 있잖아요."
"그럼 그쪽은 저랑 계속 있을 거에요? 나 죽나 안 죽나 지키면서?"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몸을 떨고 있었을까.
나로 인해 그의 손까지 떨리고 있다.
그의 모습이 눈물에 가려 흐릿해진다.
내가 "저기요..." 묻자 그는 "괜찮아요." 하고 날 안심시켰다.
다시 "저기요..." 물었다.
"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현수요... 송 현수."
"죄송한데요..."
목이 메여와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지푸라기에 손을 뻗치는 심경이란 게 이런 건가...
그가 "뭐가 죄송해요." 했다.
"죄송한데 현수 씨가... 현수 씨가, 나 오늘만 지켜주면 안 되요?... 죄송해요... 제가..."
타지에서 올라와서, 라는 말이 나오려던 순간 눈물이 주체되질 않았다.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여자 몇 명 밖에 없어요.
나 좀 살려주면 안 되요?
나 살리려고 이렇게 고생했으니까...
그래서 하긴 죄송한데요.
그리도 나,
오늘만 나 살려주면 안 되요?
죄송해요.
아까 막 말 무시하려고 해서,
내가, 나 때문에 그 아저씨한테 뺨 맞은 거랑,
아줌마한테 험한소리 듣게한거랑...
막... 너무 미안해요.
미안해요.
어느 것 하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울음 속에 묻혀버리는 말들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주저 앉자, 현수 씨가 같이 몸을 낮춰왔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는 나를 부축하지도,
그렇다고 그냥 내동댕이 치지도 못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한동안
환각제라도 삼킨 것처럼
그에게 반 의지하며 걸어야 했다.
이제는 완연히 깊어진 어둠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곧 니가 죽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역을 향해 걸으며, 그는 오늘 내게 용기내 다가오기까지를 두런두런 늘어놓았다.
세 번째 여자가 사라지고 느꼈던 죄의식과 네 번째 여자가 사라지고 절망하던 나날,
내가 이미 다섯 번째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밤들.
오늘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벌써 몇 번의 기회를 날려버렸던 미안함.
스스로가 남을 지키지 못핬다는 생각에 잠못들었던 나날.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지하철 역 앞에서 그를 마주쳤던 그 순간이 새롭게 느껴졌다.
저.이.상.한.사.람.아.니.구.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짜고짜 내가 죽는다고 했다면,
나는 이 남자를 믿었을까?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현수 씨를 무시하고 돌아서곤,
오늘 밤,
죽었을까?
역 앞 벤치에 다시 자릴 잡고선,
옛 일들이 두서 없이 떠올랐다.
유치원 때, 떡볶이 간식을 기다리던 별 시덥잖은 기억이나,
고등학교 첫 사랑 선생님 얼굴이나,
냉장고에서 몰래 소주를 꺼내 먹어봤던 일,
엄마, 아빠, 친구들...
역주변이 한적해지자,
이 넓은 공간 어디에서고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갈 수록 시야는 조금씩 좁아져만 갔다.
"현수 씨..."
"네..."
"저는 시은이라고 해요... 이 시은. 혹시 언젠가 안 보이기 시작하면... 그러면..."
"오늘 밤만 지나면, 부모님계신 부산으로 가요. 제가 기차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
"..."
"이제 나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아침 일찍이면 기차가..."
"아니요... 제 방이요..."
"..."
역 앞에서 밤을 센다는 것이,
정답이라곤 느껴지질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저기 저 나무 뒤에서.
건물에 숨어.
어두운 그림자에 숨어.
"현수 씨, 나 집에 대려다 주면 안되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시간이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나만큼이나 겁에 질린 것만 같다.
길을 걷는 동안 옆으로 지나가는 모든 빌딩 문들과 골목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이렇게 존재감을 갖을 수도 있구나... 싶다.
우리 집에서 5시까지만 있어줘요.
집에 다다르며 수차례나 그 말이 하고 싶었다.
5시. 지하철 첫 차 다니기 시작하면, 길을 나서서
그대로 수원이나 서울역으로 벗어나서...
그때부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랑 5시까지만 있으면 안 되요?
그 말이, 얼마나 민폐일까.
지금도 두려움에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그는 나 원룸에 이르러 내 방 문 앞까지도 주변을 경계했다.
센서 등이 켜질 때마다 나도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등 밑에 어디선가 봤던, 하지만 누군지 모르는 얼굴이 서있다면,
그게, 마지막.
그런 생각을 하자니, 계단을 오르는 것이
사형대에 오르는 기분과 다를바 없었다.
"제가 문 열어드릴게요."
나를 복도 한편으로 밀며 그가 말했다.
그에게 키를 건네는 것이 죽음의 바통을 넘기는 것 같다는 깨름칙함이 든다.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첫 대면 하는 건 결국 문을 연 사람...
그는 키를 문에 걸기 전에 성큼 내 뺨까지 얼굴을 가져왔다.
그리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뛰어요." 했다.
작은 원룸이었다. 문을 열면 바로 센서등에 안이 훤히 다 비출터였다.
그를 의지하며 그의 등에 바짝 선 채 열리는 문 틈을 지켜보았다.
센서등이 방을 비춘다.
현관 앞의 냉장고,
그 앞에 있는 미니 테이블,
그 뒤로 서랍장,
컴퓨터...
그가 현관 옆의 벽을 더듬어 방의 불을 켰다.
아무도, 없다. 그는 잠겨있는 화장실문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여기있어요." 속삭였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 조심조심 화장실로 향했다.
장판을 비비는 신발소리가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연 순간
밖의 계단에서 사람이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화장실의 문 안을 확인할 틈도 없이 내게로 달려와 현관을 닫아버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현관의 자물쇠들을 재빨리 잠궜다.
발소리는 곧 내 방 앞을 지나가더니
문을 두드리며 누구야, 불렀다.
이내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한 번,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한 번.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화장실의 텅빈 풍경을 보며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 또한 화장실을 천천히 돌아보곤 나를 따라 현관에 주저 앉았다.
그가 안도의 웃음을 한 차례 뱉었다.
그를 따라 나도 웃음이 나왔다.
또 눈물이 터졌다.
그를 얼싸안고 한참 눈물을 쏫아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불안을 지워버리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불안을 지우는데 효과가 있어선지,
그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신기할만큼 우리는 가깝게 살고 있으면서도,
또 여러번 마주친 사이임에도,
오늘에서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신기한 감각이다.
그가 물었다.
"몇 시나 됐어요?"
"열... 한시 오십 팔분... 다섯 시간만 더 버티면 되네요. 왜요?"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시간이 빨리 간 것 같아서요. 시진 씬 안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진이 다 빠질만큼, 정신이 바짝 긴장 된 하루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잠 올려고하네요. 세수라도 안 하면 못 버티겠어요... 수건... 좀, 빌릴 수 있어요?" 했
다.
서랍장에서 새 수선을 꺼내 건네자,
그가 수건을 받으며 멈춰섰다.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왜요?" 묻자, 그 또한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많이 마주치면서도,
언젠가 시진 씨 방에서, 뭐랄까...
이렇게 시진 씨 한테 수건을 건네 받고...
이런 건 상상을 못해봤거든요...
새로운 느낌인 것 같아서요. 아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시진 씨 볼 때마다 항상 몇 번을 봤고,
언제 봤고, 하는 거 다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뭔가... 하하... 이상하네요."
그의 말에 대답을 하려는 데,
그가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고 곧 세면기에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용해진 방에서 물끄러미 화장실을 문을 지켜보았다.
현관문은 괜히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십자가를 그리고 있다.
계속 화장실 문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어 볼 말이 떠올라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는 수건에 얼굴을 닦아내며 나왔다.
수건에 얼굴을 부비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장난기서린 개구장이 같다.
그가 나를 보고 웃으며 묻는다.
"몇 시나 됐어요?"
금방 물어 놓고선...
"열... 두시 조금 넘었어요... 현수 씨 근데요."
"네."
그가 계속해서 웃어주니, 내 입에도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부산에 내려가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근데요... 현수 씨, 우리는 몇 번 마주친거에요?"
그는 수건을 땅바닥에 툭 던져놓곤 대답했다.
포근한 웃음이 끝없이 날 안심케 한다.
"오늘까지? 44번."
-끝-
비공감 사유를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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