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목련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이영춘, 골목 안 맨 끝 집
골목안 맨 끝 저 집에 귀 뉘인 자 누구일까
신발 두 결레 댓돌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문틈 새로 희미한 불빛 가쁜 숨 고른다
들여다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저 속의 삶
어디론가 집 떠난 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것 칭얼대는 소리,남루한 창틀 흔들리는 소리
갈퀴같이 마디 굵은 손으로 양은 냄비 달그락대는
저 빈 그릇의 헛한 마음
발자국 소린가 귀 기울여도 돌아오지 않는 소리
어느 새 골목 안은 죽은 듯 깊은 잠에 바지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이 동네 맨 끄트머리 저 집엔
누가 있어 이 밤도 등불 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이상국,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을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끊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
최문자, 미움
그는 온 몸이 칼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칼이 된다
그를 품는 자도 칼이 된다
세상은 물처럼 돌아가도
그는 얼어서 흐르지 않는 물이 된다
그가 있어서
세상은 늘 얼룩지고
그가 있어서
비명은 물소리처럼 가깝다
그는 불면증이라 잠들 수 없다
저 홀로 누워
함부로 눈뜨고
깊은병 앓다가
흐를 피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시사철 영롱한 칼이다
이현승, 젖지 않는 사람
죽은 사람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듯이
나는 화분에 물을 주면서 귀를 기울인다
의심은 물줄기를 따라 뿌리들의 어두운 층계에 머문다
화분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귓속은 물을 채우기에는 너무 작은 용기이다
죽어가는 나무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저녁은 제 물줄기를 부어 텅 빈 집을
수족관처럼 빈틈없이 채운다
이럴 때 가장 어두운 동굴은
눈 속에 있는가 귓속에 있는가
어떻게 돌고래들은 해안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하고
어떻게 나무는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는가
어떤 범람이 나무에게서 호흡을 빼앗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