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균, 껌
지하도
복권 판매소 옆
맨 바닥에 붙어 있는
단물 빠진
그를
툭
떼어내자
길게 길게 이어지는
신음 소리
살
려
줘
요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이선자, 돌에 물을 준다
돌에 물을 준다
멈춘 것도 같고 늙어 가는 것도 같은
이 조용한 목마름에 물을 준다
이끼 품은 흙 한 덩이 옆으로 옮겨 온
너를 볼 때마다
너를 발견했던 물새우 투명한 그 강가의
밤이슬을 생각하며 내가 먼저 목말라
너에게 물을 준다
나를 건드리고 지나는 것들을 향해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뒤돌아 볼수도 없었다 나는 무거웠고 바람은 또 쉽게 지나갔다
움직일 수 없는 내게 바람은 어둠과 빛을 끌어다 주었다
때로 등을 태워 검어지기도 했고 목이 말라 창백해지기도 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할수 없을때, 긴꼬챙이 같이 가슴을 뚫고 오는
빗줄기로 먹고살았다 아픔도
더더구나 외로움 같은 건 나를 지나는
사람들 이야기로만 쓰여졌다 나는 몸을 문질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소리도 없이 몸을 문질렀다
내 몸에 무늬가 생겼다
으깨진 시간의 무늬 사이로 숨이 나왔다
강가 밤이슬 사라지고
소리 없이 웅크린 기억들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너의 긴 길이 내 몸 속으로 들어 왔다
멈출 수도, 늙어갈 줄도 모르는
돌 속의 길이
나에게 물을 준다
박정원, 물비늘을 읽다
누군가 왔다간다
바람이다
슬쩍 건드려보기도 하고 세게 치고 달아나기도 한다
숨이 잦아들자 강물은
하늘 자리엔 하늘을 구름 자리엔 구름을 산 자리엔 산을
어김없이 품는다
다시 바람이 꽃잎으로 조로록 내려앉자
거꾸로 앉힌 그들 자리에서는
안팎으로 드나들던 독수리 날갯짓이, 새끼염소 울음이
푸른 멍을 입히던 물푸레나무 이파리가
갈기갈기 찢어진 깃발로 팔랑인다
신발 두 짝만 보듬은 사내의 젖은 눈이 아롱자롱
강물 위를 걷는데
수면을 박차고 치솟는 물고기 한 마리
덥석 그 눈빛을 물고 따라간다
갔던 바람도 돌아와 촤르르 빗질을 한다
강을 건넌 사내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빗살문자를 해독한다
하늘이, 구름이, 산이
흐트러짐 없이 그 광경을 베끼고 있다
수심(愁心)이 깊은 자리마다 빛을 낸다
저리 빛나는 줄도 모르고 강물은 가끔 빗살로 흐느낀다
굴절의 그늘이 더욱 눈부시다
장이지, 어깨 너머의 삶
그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소매 끝이 닳은 양복이 한 벌 있을 따름이다
그 양복을 입고 딸아이의 혼인식을 치른 사람이다
그는 평생 개미처럼 일했으며
비좁은 임대 아파트로 남은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는 굽은 등
투박한 손을 들키는 사람이다
그는 그 거대한 손으로만 말을 할 줄 알았다
언젠가 그가 소중하게 내민 손 안에는
산새 둥지에서 막 꺼내온 헐벗은 새끼 새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새근대고 있었다
푸른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어두움의 음습한 숲에서
홀로 빛나던 새는 지금 어느 하늘을 꿰뚫고 있을까
그의 손에 이끌리어 가 보았던 하늘
구름 바람 태양 투명한 새
그는 그런 것밖에 보여줄 줄 모르던 사람이다
그의 내민 손 안의 시간
그의 손에서 우리는 더 무엇을 읽으려는가
그는 손으로 말했지만
우리는 진짜 그를 한 번도 보지는 못했다
그는 보잘것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내민 손에 있지 않았다
어깨 너머에 있었다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선술집에 앉아
그는 술잔을 앞에 둔 채 어깨 너머에서 묵묵했다
그 초라한 어깨 너머를 보고 싶은데
차마 볼 수 없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는 어깨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다
정한모, 나비의 여행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 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