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복효근, 화초와 잡초 사이
들꽃 화단에 꽃들 피었다
동자꽃 범부채 물레나물
토요일 봉사활동 시간
들꽃 화단에 잡초제거란다
왁자지껄 풀을 뽑는지 꽃을 뽑는지
국희야 혜림아
야야 그것은 잡초가 아니란다
야야 그걸 밟으면 어떻게 하느냐 지청구했더니
홍수가 한마디 한다
잡초하고 야생화하고 뭐가 달라요
평소 말썽만 피워 미움 바치던 녀석이 언제 그렇게 여물었냐
내가 할 말이 없구나
뽑아던진 쇠비름에도 노란 꽃이 맺혔구나
흔해빠진 달개비도 푸른 꽃이 훈장 같구나
그래, 무엇이 잡초고 무엇이 화초라더냐
이것은 해란초 이것은 풍선꽃
저것은 물레나물 저놈은 부처꽃
이놈은 인섭이 저놈은 기린초
엉겅퀴 민애 나래 참나리 꿩의 다리 상연이
미운 놈 고운 놈 마구 섞여서
잡초와 화초가 마구 섞여서
사람과 화초가 마구마구 섞여서
너나없이 하나 같이 들꽃 같아서
토요일 2교시가 온통 꽃밭이다
이기철,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이정록, 새 발자국을 따라서
말라붙은
저수지 밑바닥을
끈적끈적 지나가는 새 발자국
그가 바라보았던 풍경의
반대편으로 화살표 찍혀 있다
새는 왜 눈뜬 것들에게
과거 쪽으로 과거 쪽으로
화살을 쏘며, 사라졌나
두개골을 닮은 마지막 웅덩이
시궁창 하늘 속으로
안도현, 순댓국 한 그릇
구린내 곰곰 나는 돼지 내장
도회지에서는 하이타이를 풀어 씻는다는데
산서농협 앞 삼화집에서는
밀가루로 싹싹 씻는다
내가 국어를 가르치는 장미네 집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 먹을 때의
깊은 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