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 내 몸에 짐승들이
늑골에 숨어 살던 승냥이
목젖에 붙어 있던 뻐꾸기
뼛 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어느 날 온 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우우 깊은 산
우우우 울고 있는 저 깊은 산
그 마음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강현국, 별이 빛나는 밤
한 고요가 벌떡 일어나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리듯
이별은 그렇게 맨발로 오고, 이별은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낱말들의 귀를 자르고
외눈박이 외로움이 외눈박이 외로움의 왼쪽 가슴에 방아쇠를 당길 듯 당길 듯
까마귀 나는 밀밭 너무 솟구치는 캄캄한 사이프러스, 거기
아무도 없소? 아무도
박서영, 극장 의자
나는 순정한 눈빛을 가진 짐승을 만나러 간다
영화가 끝난 뒤 맨 뒷자리에 구겨져 앉아 있을 때
음악은 초조하게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가고 불은 성급하게 켜졌고
청소부는 너무 빨리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의자가 짐승처럼 나를 안아 줄 때
외로움은 잔혹하구나, 연인들이 하나 둘 극장을 빠져나간 뒤
맨 뒷자리 누군가에게 손목 잡힌 채 문득 생각한다
외로움은 극장 의자에서 시작되어
극장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극장 의자를 떠나는 것이라고
텅 빈 극장 의자들은 맹수가 아니라 착한 짐승이구나
어두컴컴한 방에서 무리지어 참 착하게 순하게 살고 있구나
이곳이 내 실존의 장소처럼 불안하고 평화롭다
뭉쳐진 먼지덩어리들
자막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청소부는 너무 빨리 상황을 정리한다
이곳이 내 이야기의 시작이면서 끝일지도 모르는데
스크린의 문장들이 도마뱀처럼 뛰어 달아나고 있다
이성선, 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안상학, 백수
요즘 아내의 방문 여닫는 소리 자꾸만 크게 들린다
도대체 뭘 해요 쿵, 뭐 좀 어떻게 해봐요 쿵
부글부글 속 끓다가도 끽, 뭐라 목젖을 잡아당기다가도 끼익
한숨 한 번 내쉴 양이면 그마저 문소리에 끼여 끽
문소리가 격해질수록 나는 벙어리가 되어간다
쿵 하는 문소리 사그라드는 틈으로 아내의 목소리
아이더러, 아빠 식사하세요 해, 하는 말 엿듣고 눈물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