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RJnUmkbn6bs
송경동, 가두의 시
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퉁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詩)가 있다
종로 5가 봉제골목 헤매다
방 한칸이 부업방이고 집이고 놀이터인
미싱사 가족의 저녁식사를 넘겨본다
다락에서 내려온 아이가 베어먹는 노란 단무지 조각에
짜디짠 눈물의 시가 있다
해질녘 영등포역 앞
무슨 판촉행사 줄인가 싶어 기웃거린 텐트 안
시루 속 콩나물처럼 선 채로
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 노숙인들 긴 행렬 속에
끝내 내가 서 보지 못한 직립의 시가 있다
고등어 있어요 싼 고등어 있어요
저물녘 "떨이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골목 간절한 외침 속에
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양현근, 안부가 그리운 날
사는 일이 쓸쓸할수록
두어 줄의 안부가 그립습니다
마음안에 추절추절 비 내리던 날
실개천의 황토빛 사연들
그 여름의 무심한 강역에 지즐대며
마음을 허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하게 벗는 일이라는 걸
나를 허물어 너를 기다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리라고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내릴 거라고
사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욱 두려웠던 날들
목발을 짚고 서 있던
설익은 시간조차도 사랑할 줄 모르면서
무엇인가 담아낼 수 있으리라
무작정 믿었던 시절들
그 또한 사는 일이라고
눈길이 어두워질수록
지나온 것들이 그립습니다
터진 구름 사이로
며칠 째
먹가슴을 통째로 쓸어내리던 비가
여름 샛강의 허리춤을 넓히며
몇 마디 부질없는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잘 있느냐고
이병률, 나비의 겨울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김완하, 남의 신발이 나를 신고
어제저녁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신발을 바꾸어 신고 돌아왔다
누가 먼저 내 신을 신고 갔는지
내가 그의 신을 신고 왔는지
오던 길 멈춰 내려다보니
남의 신발이 나를 신고 집을 향해 오고 있었다
잠시 서서 내 발에 힘을 주었다
아, 다른 사람의 신발이
이렇게 나의 발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니
다음 날 아침은 엘리베이터 타지 않고
11층에서 계단을, 그것도 두 칸씩 뛰어내려
어제와 다른 쪽 길을 향해 걸었다
누군가의 발을 옥죄었을지도 모를 신
내게 와서 비로소 편안해진 그의 신발
누군가에게 가서 그의 발을 품고 있을
나의 신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고영민,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