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윤, 당신의 골목
그곳이 지도에 없는 이유는
햇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이죠
얼굴을 맞댄 오래된 집들은
그 자리에서 늙어가죠
혹자는 부질없는 집착이라고 하지만요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
가끔은 누가 볼까 휘파람을 불지만
소리는 그림자를 춤추게 하죠
꿈틀꿈틀 일어나는 기억
슬금슬금 쫓아오는 골목, 뒤돌아보는 당신
허름한 창문 틈새로 슬픔이 불빛처럼 새어 나오고
개 짖는 소리에 골목이 가늘어져도 두려워 마세요
골목의 병명은 지도에 나타나지 않아요
늘 웅크려 자는 당신
오래된 골목 하나 품고 사는 당신
십년 혹은 이십 년 전 어디쯤
쓰러져 있는 당신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골목아, 라고 불러보세요
골목은 엎어져도 골목
무르팍이 깨어져도 또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
가고 있지요 무심하게도
다시 뒤돌아 걷지 않는 한
골목은 쉽게 끝나지 않지요
몇 번이고 다시 방영하는 드라마처럼
공광규,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심보선, 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迷妄)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이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김성충, 철없는 아이
너는 세상을 너무 모른다
그런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 봤겠지
너는 셈이 약하다
그런 새하얀 마음으로
나를 선택 했겠지
너는 눈물이 많다
그런 따스한 손길로
나를 안아 주었겠지
나는 너를
너무 모른다
그런 사랑이 많은 너를
철없는 아이라 생각했었지
정채봉, 기도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