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목련에게 미안하다
황사먼지 뒤집어쓰고
목련이 핀다
안질이 두렵지 않은지
기관지염이 두렵지도 않은지
목련이 피어서 봄이 왔다
어디엔가 늘 대신 매맞아 아픈 이가 있다
목련에게 미안하다
정경란, 또 하나의 열쇠
아이가 또 열쇠를 잃어버렸다
등짝을 때리고 내 열쇠를 건네준다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아이가
성난 얼굴을 보더니
훌쩍이며 그냥 나간다
하루 종일
내 마음속에 틀어 앉아 울고 있는 아이
열쇠는 다시 복사하면 되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에 자꾸 전화하지만
텅 비어 있는 집
내가 아이에게 건네 준 것은
열쇠만이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왈칵 쏟아질 서러움
아이는 어쩌면 그 서러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빈집에 들어와 가장 먼저 불을 켜는 사람이
바로 아이라는 것을
그 불빛보고
집에 들어선다는 것을
신현정, 자전거 도둑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박찬, 사람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 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 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맹문재, 사십세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X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실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