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우, 잠이나 자게
잠이나 자게
그렇게 마음이 쓸쓸하고 막 울고 싶을 땐
일찍 집에 들어가 잠이나 자게
세상에 고운 사람 하나 없고
모든 게 다 귀찮아 질 땐
그저 죽은 듯 하루종일 잠이나 자게
전화도 내려놓고
탁상시계도 내다놓고
문도 꼭 걸어 잠그고
불도 다 끄고 실컷 잠이나 자게
세상에 그리운 이 하나 없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땐
그저 죽은 듯 하루종일 잠이나 자게
문성해, 웃는 개
체육복 차림의 남자를 따라오는
저 개의 입술이 비틀리며 웃고 있다
그동안 내가 보았던 혼자인 개들은 웃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한 땀 한 땀 박음질로 가던
땅의 충복들
개가 입술을 끌어당겨 저리 웃을 줄은 몰랐다
소속된다는 것은
웃는 법을 배우는 것
소속된 개가
소속되지 못한 나를 비웃으며 간다
휘늘어진 서녘이 질기게 웃고 있다
강문숙, 자루속에서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낱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뜷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속에 코를 박고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밤을 완두콩과,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 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 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
김혜순, 연습
나날이 다가와서
우리를 깨우고
연습시킨다
이렇게 죽는 방법이 있지
일어나 기지개켜다가 이렇게
이렇게 배불리 먹고 배가 터져서
이렇게 희희낙락하다가 숨이 억 막혀서
이렇게 절망적인 대화를
나누다 말이 끊어짐과 동시에
맥을 놓으면서
이렇게 죽는 방법도 있지
나날이 다가와서
우리를 잠들게 하고
또 연습시킨다
그렇게 흑심을 감춘 채
축복의 말을 중얼거리다
신달자, 눈물
눈물은 눈에서 흐르는 게 아니었다
마음에서 흐르는 게 아니었다
발끝에서 발등으로 치솟다가
머리끝에서 목덜미 아래로 기슭을 치며
눈물은 살이 녹아
몸전체에서 흐르는 것이었다
뼈가 삭아 물이 되는 것이었다
붉은 피가 바래고 바래
하얗게 서릿발 내린
서슬 푸른 비수의 날이었다
장미가 혼신으로 불숭어리를 만들고
어느 날 발 아래 붉은 재를 지우듯
마침내 응어리를 쏟아내는
곰삭은 한이었다
하얀 피 하얀 피 뭉쳐
또아리 틀어 날름대는
시퍼런 목숨의 낙하였다
떨어져 닿는 곳마다 불을 당기는
몇천도를 넘어가는 가열한 내 생의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