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스스로 그러하게
밤새 비 내린 아침
옥수수 거친 밑둥마다
애기 손톱만한 싹이 돋아났다
지가 잡초인 줄도 모르고
금세 뽑혀질 지도 모르고
어쩌자고 막무가내로 얼굴 내밀었나
밤새 잠도 안 자고 안간힘을 썼겠지
온몸 푸른 심줄 투성이 저것들
저 징그러운 것들 생각하니 눈물난다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솟아오른 저 작은 생 앞에
내 시끌벅적한 생애는 얼마나 가짜인가 엄살투성인가
내가 인간으로 불리기 전에도 내 잠시 왔다 가는
이승의 시간 이후에도 그저 그러하게
솟았다 스러져 갈 뿐인 네 앞에
너의 부지런한 침묵 앞에 이 순간
무릎 꿇어도 되겠는가
이생진, 낙엽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신용목, 거미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세월은 잠들면 구천(九天)에 가 닿는다
그 잠을 깨우러 가는 길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많이 향하고
길 너머를 아는 자 남아 지도를 만든다
끌린 듯 멈춰 설 때가 있다
햇살 사방으로 번져 그 끝이 멀고, 걸음이 엉켜
뿌리가 마르듯 내 몸을 공중에 달아놓을 때
바람이 그곳에서 통째로 쓰러져도 나는
그 많은 길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작은 것들 날아아 길을 잃고 퍼덕일 때, 발이 긴 짐승
성큼 마지막 길을 가르쳐주는
나는 너무 큰 짐승으로 태어났다
박남희, 해바라기
아름다움만으로는 모자라
너는 그토록 많은 씨앗을 품고 있었구나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난해하다
신은 왜
태양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저렇듯 욕심 많은 여자로 만들어 놓았는지
해 설핏한 가을 날
아름다움으로도
열매로도 온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쓸쓸한 논둑길을 혼자 걷고 있는 아내여
미안하다
약속인 듯 네 몸에 심어두었던
촘촘한 말들이 미안하다
박정대,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 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