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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GmCXMBdYIAI
신지혜, 밑줄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여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공(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강인숙, 가랑잎
철없이 푸르더니
당돌하게 팔랑거리더니
무엇이 널 낙엽되게 하였나
뒹구는 잎사귀마다 한결같은 아우성
너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
누가 날 예까지 끌어와 아침부터 밤까지
한 계절 쓸쓸함을 노래하게 하는가
슬픈 영혼 다독이는 건
안기고 싶은 별빛뿐이어라
둥글게 품은 달빛뿐이어라
지난날들 되짚어 보아도
가랑잎만 서러워라, 문밖에 있는 나는
마종기,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원기연, 인생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으나
사람의 냄새가 그립다
나라고 여겼던 나를 잊음으로
새로운 내가 되기를
인생, 그 쓸쓸함
세월이 내린 가혹한 형벌
삶을 구가하던 내가, 한없이 가여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목석이기를 바랐으나
목석이 아니요 사람이라는 것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삶의 의문
영혼의 허기진 배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 인생을 위하여
온 몸으로 청춘을 불살랐으나
인생은 단 한번도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인생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으나
내가 인생을 위로해야겠다
나를 위하여 인생을 안아 주어야겠다
곽재구, 고등어 장수
어느 날
강변 내 오두막집 앞에
한 고등어장수가 닿았습니다
먼 바다에서 온 그의 고등어들은
소금에 잘 절어 파랗게 빛났습니다
고등어 값은 너무 비쌌답니다
난 이렇게 말했지요
왜 고등어 값이 쌌다가 비쌌다가 그러지요?
먼 바다에서 온 고등어장수가
내게 말했답니다
당신 제일 가까운 곳의 사람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면서
먼 바다 고등어의 값을 어떻게 셈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