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아버지의 고무신
햇살 다냥한 댓돌 위에서
앞뒤가 고르게 닳은 왼쪽 신발과
뒤축만 닳은 미농지처럼 얄팍해진 오른쪽 신발이
금실 좋은 부부처럼 시설거리고 있다
단장(短杖)과 짝을 이룬 하얀 고무신은
엘리베이텨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의 40년 지기
따로 노는 물지게처럼 다리와 의족이 어그러져
무릎을 펴고 구부리기가 힘겨운 아버지는
양복차림에도 고무신을 신는다
오른손의 단장이 앞장서 바닥을 짚으면
온몸을 실은 오른발 뒤축이 따라 딛고
꽃잎에 앉는 나비처럼 앞축이 살포시 놓인다
왼발도 뒤쫒아와 수평을 이룬다
단장 손잡이만큼이나 굽은 양어깨를 품은 채
바람 가득 싣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댓돌 위 아버지의 고무신
김남조,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돗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복효근, 콩밥을 먹으며
밥에 놓아 먹으려 하루 한 나절 불려놓은 검정콩이
그렇게 또록또록 눈을 뜰 줄이야
성급하게 도도록하게 뿌리를 내밀 줄이야
마악 지은 밥에 박힌 검정콩은 뿌리가 한결 더 돋은 것도 같은데
그랬을 것이다 더 뜨겁고 더 깊은 데로 뿌리를 뻗느라
압력솥 속에서도 제 몸을 옴작인 흔적
그것들은 내 뱃속에 들어가서도 눈을 더 크게 뜨고
내 안의 더 깊고 뜨거운 데를 찾아
자꾸만 뿌리를 내릴 것인데
나는 콩을, 그 잎을 그 꽃과 꼬투리를 콩포기를 먹은 셈이므로
아무렇게나 숟가락을 붙들고 배가 부르고 그저
하루의 보람이 콩말만큼이나 졸아들 때면
내 안의 수많은 눈들이 새록새록이 눈을 뜨고
수많은 콩포기가 가만가만 나를 흔들어주었으면도 싶다
내 안에도 무슨 뿌리 같은 것이 내려서
깊어지며 뉘우치며 문득문득 뜨거워지고만 싶은 것이다
이진엽, 시의 힘
그대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잠시 놀랐었지
가을 들판이 그려진 액자
그 곁에 세워진 책장의 모서리 밑에
누군가의 시집 한 권이 꼬옥 깔려 있음에
아냐, 놀랄 것도 없었어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그대는 얼마나 책장과 씨름하다가
그 지혜를 얻었겠는가
한 권의 작은 시집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소중한가를
그대는 절실히 느꼈으리
비록 읽히진 않아도
혼신의 힘으로 무거운 원목을 받치고 있는
저 시집의 넉넉한 힘
시의 언어가 모이면 얼마나 굳센가를
세상은 비로소 깨달았으리
박재희, 달팽이
나는 언제나 갇혀있다
스스로 눈 막고, 귀 막고 살아온 날들이
벽으로 쌓여
나의 집이 되었다
때로 나를 허물어
몸이 커지면
다시 쌓는 집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
안으로만 차오르는 부끄러운 열정
그대 앞으로 다가갈수록
그대는 더욱 멀어지고
관 속으로 들어가
홀로 더 높은 벽을 만든다
늦가을
낙엽처럼 이 벽, 스르르 허물어지고
빈집이 될 때
그대 앞에 온몸으로 다가서기 위해
오늘은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