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균, 뻥튀기 아저씨
신림 8동 재래시장 담벼락에 붙은
뻥튀기 아저씨
골목 바람 저문 날도 심심치 않게
튀겨낸다
사카린 한 숟갈 집어넣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청사포 앞바다 발동기 돌리 듯
배앵뱅 뻥튀기 통을 돌리면
얼씬거리던 추위는 저만치 물러나고
울퉁불퉁 일어나는 팔뚝의 배 한 척
물때 만난 참조기들이
저녁놀에 튀겨지던 윤기 나는 바다
신들리게 그를 당기던 시절
숨 가쁜 세상
누가 돌려주지 않아도 어지러운데
뻥튀기 통은 자꾸자꾸 돌고
두둥실 떠나지 못하는 배는
오늘도 낡은 팔뚝에서
출항을 포기하고 만다
서정숙, 항아리
폭설에 모자 하나를 더 쓰고도 말이 없다
날도 풀리기 전에
퀘퀘하게 곰팡이 뜬 메주덩이를 넣고
소금물을 부으면
몸을 연 채 바다를 마신다
정성으로 돌보는 손길이 좋아
햇살에 잡균을 쫓아내고
살을 섞어 장맛이 익어가면
바람에 얼굴 맡긴 채 숨만 쉰다
순박한 몸으로
배신할 줄 몰라
누군가를 위해 한결같이
깊은 맛 우려내는 항아리
어머니도 나도
조금씩 닮으며 산다
최영애, 세종대왕을 만나다
세종대왕이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지체 높으신 분이
어쩌다 가랑잎 이불 삼아
길바닥에 누워 계시는지
분식집 아줌마 쟁반 위에서 뛰어내리셨나
심부름 가는 아이 주머니에서 흘러내리셨나
이 눈먼 돈
어쩌다 내 눈에까지 띄었을까
담쟁이 넝쿨 소란스런 시월
바람의 숨결 한 호흡조차
백지에 옮기지 못하는 풋내기 시인이
왕을 일으켜 세우려니 가슴이 뛴다
낙엽 한 장 주울 때와
어이 이리도 다를까
책갈피 속에서 일년을 마름질된 단풍잎은
사랑을 무릎꿇게 했는데
이 한 장의 지폐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장석남, 맨발로 걷기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문정영, 나무길
나무와 나무 사이에도 길이 있다
바람이 건너다니는 길이다
새가 날개를 접었다 펴면서 건너면
길은 수많은 의문의 잎을 달고 생각에 잠긴다
그 옆으로 열열이 달려가는 전봇대가 보인다
그 길은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서로를 붙잡을수록
지독한 가슴앓이를 한다
서로를 묶는 일 나무들은 하지 않는다
놓아둘수록 길은 수많은 갈래를 만든다
어디든지 나무만 있으면 갈 수 있다
늦은 봄까지 초록이 전염되는 것을 보면 안다
가을이 깊을수록 의문을 떨구어
길을 환하게 한다
어렵게 어렵게 살려하지 않는다
가고 오지 못한 길 사람만이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