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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옷을 입은 여성운동단체인 'to live' 포스터>, 1988~2000년경 |
1990년대의 제도적인 진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국가 출범 이후부터 모든 이들에게 부과된 종교적인 구속뿐 아니라, 병역의무, 국가 안보의 책무는 여성해방 투쟁에 크나큰 장애로 작용해왔다.
이스라엘은 여군의 전투기탑승을 허용한 데 이어, 전차탑승 허용도 검토 중이다. 남녀 모두에게 의무징병제를 적용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인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의 아이콘이라고 할 만한 자국 여군의 활약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근동지역의 유일한 민주국가’인 이스라엘은 이미 1969년에 최초의 여성 총리인 골다 메이어 전 총리를 배출한 국가가 아니던가.
현재 이스라엘 방위군 홈페이지에는 ‘여성’란이 따로 마련돼 있다. 여기에는 국경을 따라 정찰 중인 ‘강하고 용맹한’ 여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 교과서에도 땅을 개간하고 길을 내며 보초를 서는 키부츠(집단농장공동체)의 여성 개척자들의 사진과 함께, 얼굴에 위장크림을 칠하고 우지 기관단총을 둘러맨 건장한 여군들의 사진이 실리곤 한다. 그러나 평등하고 현대적인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에 대한 믿음이 허망하듯, 이 사진들도 사실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1) 이스라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지닌 이면은 그림자 뒤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군사(자녀) 출산이 유대여성의 사명”
이파 페미니즘 센터의 사라이 아하로니 연구원은 “(여전히 소외돼 있긴 하지만) 초기 키부츠에서도 여성들은 경작지나 공장보다는 주방, 텃밭, 보육시설, 세탁실 등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선언문이나 1951년 제정된 여성동등권리법 모두 성 평등의 원칙을 선포하고 있긴 하지만, 당시의 개척자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건국 공신들은 국가를 새롭게 세워가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의무는, 유대민족의 존속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봤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였던 다비드 벤구리온 전 총리가 4명 이상의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것은 곧 ‘유대인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1949년에는 10명 이상의 자녀를 출산한 여성에게 ‘모성 영웅’의 칭호를 내리기로 결정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1960년대까지도 이스라엘인들은 신문을 통해 자녀의 출생을 알리며 ‘또 한 명의 군사’가 탄생했음을 함께 축하하기도 했다. 출산을 장려하는 유대민족의 명령은 팔레스타인인과의 인구경쟁을 거치며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그 결과 현재 이스라엘의 여성 1인당 평균 출산율은 3.1명으로 2015년 OECD 회원국 중에서도, 이집트를 비롯한 인근의 지중해 연안 국가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2)
‘가내 전선’에 갇힌 채 번식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던 여성들은 테오도르 헤르츨이 주창한 군사적 담론에는 거의 포함돼 있지 않았다. 시온주의의 창시자이기도 한 헤르츨은 일기장에 유럽의 유대인들, 즉 “신중하고 겸허하며 양심적인 게토(유대인 격리거주지역)의 사람들은 자신의 호소를 이해할 것”이라고 적으며 유대민족의 자유와 ‘힘’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강한 유대인의 남자다움은 막강한 민병대의 전투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여성들은 그런 군사들의 자상한 어머니, 아내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군대가 국가의 핵심기관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만큼, 지금도 이스라엘 내 모든 권력의 중추에는 군의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다. 실제로 많은 퇴역 장교가 낙하산 인사를 통해 정부 부처나 대기업, 대학교 등은 물론 심지어는 주요 평화 운동단체에서도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비정부기구인 ‘피스 나우’ 역시 3백여 명의 예비역 장교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단체였다. 하이파 지역에서 활발하게 페미니즘, 동성애, 반(反)시온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나 사프란은 “이 단체가 국가안보 문제를 다루기에 신뢰할 만한 곳으로 인정받기 위해 군 고위직 인사들의 목소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남성만이 탄원서에 서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매주 금요일 팔레스타인 영토점령에 대한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검은 옷의 여인단’에 속해 있는 그는 “이런 이유로, 여성들이 스스로 평화를 위한 단체들을 결성해야 했던 것”이라고 말하며 “또한 일부 여성들은 1990년대 말 레바논 남부 지역에 주둔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주장했던 ‘네 명의 어머니 운동’의 사례처럼 군인의 어머니로서도 평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1967년 팔레스타인과의 6일 전쟁에서 승리해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하면서 이스라엘의 남성중심주의가 극에 달해 가는 동안, 이스라엘의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1987년 이스라엘군의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인의 반이스라엘 투쟁)에서의 이스라엘군의 폭력과 가정 내 남성들의 폭력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스라엘의 가정폭력은 지금도 해마다 20여 명의 여성 사망자를 낳고 있을 만큼 심각하다. 1981년 히브리 대학교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학 관련 학과를 개설했던 이스라엘계 미국인 갈리아 골란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가장 큰 화두는 배우자에 의한 가정 내 폭력에 맞서는 것이었다. 특히 그 폭력이 모순적이게도 남성들이 주장하는 강자, 보호자의 역할과도 양립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 정치, 종교 속에서 여성의 위치
수많은 여성학자와 운동가들이 10여 년간 제기해 온 여러 문제들은 1980년대 말 이후 마침내 제도적 영역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골란 교수는 “1990년대는 페미니즘 운동이 법적인 혁명을 맞이한 시대였다. 국회 내 여성의원의 수는 지금의 1/3도 되지 않았지만, 그 적은 수의 의원들이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직장 및 군대 내 성 평등 문제나 성희롱 방지에 대한 법을 비롯해 100여 개 이상의 법이 표결에 부쳐졌고, 가정폭력을 막기 위한 긴급전화와 쉼터가 개설돼 대중의 관심을 끌어냈다. 1995년에는 알리스 밀러라는 여성이 여군도 공군조종사 선발에 지원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넣었고 대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현재 여군이 지원할 수 있는 보직은 전체의 92%로, 약 10년 전부터는 3개의 혼성전투부대가 생겨나 전투 보직에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2001년에는 여군 관련 문제를 다루는 참모총장 직속 보좌관직이 신설됐고, 2016년에는 그 명칭을 ‘젠더 보좌관’으로 변경하면서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가장 엄격한 용어를 사용하는 등 진보적 기관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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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키부츠의 젊은 여성>, 작자미상 |
그러나 실제 여군전투병의 수는 전체 여군의 7%에 불과하다. 가이 하손 준장은 앞으로도 여군의 전차탑승을 제한하겠다고 주장하며 지난 11월 일간지 <타임즈 오브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는 전사다.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전투부대 출신은 고위직 진급이 가능함에도, 여군의 경우 고위직 진출이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장성급까지 진급한 여성 중에는 유일하게 오나 바비바이 소장이 군 전체에서 두 번째 높은 계급을 지낸 뒤 2014년 은퇴한 바 있다.
법적 발전이 사회에서도 구체적인 효과를 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풀타임 근로자를 기준으로 이스라엘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22%에 달해 OECD 회원국 중 소득 불균형이 네 번째로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40대의 라켈 아자리아 의원은 “이스라엘 여성의 지위는 전반적으로 향상됐다”고 단언했다. 이스라엘 연립정부 구성원을 맡고 있는 중도우파 성향의 쿨라누당 소속인 아자리아 의원은, 자신의 롤모델인 힐러리 클린턴의 사진이 걸린 집무실에서 이스라엘 여성의 지위 향상에 관해 설명했다.
“오늘날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처음으로 1/4을 넘어섰다. 이스라엘 중앙은행의 카니트 플러그 총재나 레우미 은행의 라케페트 루삭 아미노크 총재도 여성이며, 남성의원들로만 구성된 정당은 그 수도 많지 않거니와 공공연하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시의 부시장직을 맡기도 했던 아자리아 의원은 지난 2008년 유대교 초정통파 지역을 지나는 노선에서 자신의 후보 포스터를 차량에서 떼고 운행한 버스회사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자리아 의원은 유대교의 규율과 복장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현대사회 및 시온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보는 ‘현대적 정통파’에 속해 있다. 현대적 정통파는 ‘하레디’라고 불리는 초정통파와는 엄연히 다르다. 83만 명의 초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사회 및 세속주의 학문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고 유대민족 고유의 복장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자리아 의원은 스스로 ‘정통파 페미니즘’이라고 이름 붙인 흐름이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며 반색했다. 아자리아 의원은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이스라엘 최고 랍비들은 건국 이래로 할라카(유대 종교법)에 정통적(또는 초정통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다. 할라카가 기도문을 외울 권리를 남성에게만 부여하는 등 매우 불평등한 법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콜레크’와 같은 여러 페미니즘 단체들이 힘을 모아 규정의 일부를 바꿔가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벳 미드라쉬(율법 연구기관)나 회당에서도 더욱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는 더 많은 여성이 탈무드를 공부하고 기도문을 외울 수 있게 됐다. 2014년에는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당한 소년의 어머니가 아들의 장례식에서 ‘카디쉬’라는 기도문을 공개적으로 외운 일이 있었다. 정통파 유대인 여성인 그가 남성만이 외울 수 있었던 이 추도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할 때, 당시 입회 중이었던 최고 랍비조차도 막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비영리단체 ‘샤하리트’ 소속 정통파 페미니스트인 테힐라 나할론은 “최고랍비의 독재를 타파하고 종교계도 개혁세력 및 온건보수세력과 경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처럼 각자가 자신의 랍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하레디(‘신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파 내부에서도 ‘페미니즘’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라켈리 이벤보임이라는 30세의 하레디파 여성은 예루살렘 내에서도 세속적 유대인을 비롯해 모든 형태의 유대인들이 오갈 수 있는 지역인 저먼 콜로니의 한 카페에 앉아 하레디파 페미니즘이 “정통파 페미니즘을 훨씬 앞서고 있다”며 입을 뗐다. 18세에 만난 남자와 20분 만에 약혼했다는 이벤보임은 초정통파 지역으로 유명한 메아 셰아림에 거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활동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기도문을 외울 권리 등 종교적인 부분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면서,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투쟁할 수 있다. 초정통파 정당 내 여성 의원 영입, 교육 및 임금 평등 등에서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라켈리 이벤보임은 그 자신도 지난 2013년 예루살렘 시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몇 번의 위협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 밝혔다. “하레디파 남성의 절반은 매일 경전공부에만 매달리느라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데, 심지어 가족수당 명목의 정부 보조금조차 줄고 있어 많은 여성들이 생활비를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하레디파 여성 중 80%가 일을 하고 있는데, 세속적 유대인 여성과 비교했을 때 경제활동 비율은 비슷하지만 소득은 약 40%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레디파 여성들이 일하는 분야나 임금수준에 한계가 있고, 고용주들도 그들 간의 일자리 경쟁을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가정 내에서만 일하던 여성들이 외부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도, 이미 커다란 진전을 이룬 셈이다.”
이혼해도 남편 동의 없이는 재혼 못 해
사실 대부분의 하레디파 여성들은 하레디 공동체를 벗어나지 않고 세속적인 삶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교육부문에서만 일하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일자리가 부족한 탓에 이들의 학업 수준은 첨단기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화되고 심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벤보임은 “사람들은 내게 호의를 표하면서도, 내가 자기 딸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긴다”는 말을 덧붙였다.
텔아비브 지역처럼 서구화되고 세속화된 ‘거품’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런 종교적 구속이 강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게 ‘정숙함’을 요구하는 규율과 남녀를 분리하는 규율이 강한 예루살렘의 일부 지역을 비롯해, 이스라엘 각지에서는 종교적 구속이 여성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아자리아 의원은 “텔아비브에 거주하며 초정통파의 시각이 그저 이국적으로만 여겨지는 상황이라면, 관대한 문화다원주의자가 되는 것쯤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부장적 규칙들로 여성들을 구속하는 하레디파가 문제의 원인으로 비판받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좌우를 막론하고 지금껏 그 어떤 정부도 정교분리를 시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데에 있다. 과연, 이스라엘에서 정교분리가 가능할까?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을 거주시키는 시온주의적 제도인 ‘귀환법’은 경전을 기반으로 하며,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들은 (그들 역시 세속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유대민족의 전통과 연결고리를 유지했고, 종교 세력에 각종 보호막을 제공해왔다. 또한 여성들에게 수많은 금기를 부여하는 소수의 초정통파 공동체에 상대적인 자율권을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대형 정당들은 군소 유대교 정당들의 힘을 얻어야 안정적인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유대교 정당들은 역대 거의 모든 정부에 지지를 약속하는 대신 여러 가지 사항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47년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는 초정통파 정당인 아구다트 이스라엘 당으로부터 이스라엘 정부를 인정받는 대신,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종교공동체) 제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따라 앞으로도 가족법과 관련해서는 종교법원에 전권을 위임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2001년부터는 자녀양육과 관련된 사건들도 일반 법원에서 다룰 수 있게 됐지만, 유대인 간의 결혼 관련 판결은 여전히 초정통파 세력이 군림하고 있는 랍비법원의 영역이다. 문제는 랍비법원이 전적으로 남성중심적인 곳이라는 점이다. 여성은 랍비가 될 수 없으므로 판사가 될 수도 없으며, 증인석도 남성에게만 허용된다. 또한 ‘겟’이라고 불리는 이혼증서는 남편의 동의 없이는 아무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결국 이혼방식은 남편 측에 유리하게 결정된다. 배우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 여성은 재혼할 수 없을뿐더러, 이런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는 ‘맘제르’(사생아)가 되고 만다. 바일란 대학의 루스 할페린 카다리 교수에 의하면, 이토록 부당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혼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아구나’(묶인 자)의 상황에 부닥친 여성의 수가 현재 1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길에서 달렸다는 이유로 돌을 맞다
오늘날 남녀 간 분리와 여성의 ‘정숙함’을 강요하는 초정통파의 주장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다. 벳 세미쉬 지역은 1990년대 말 하레디파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인구균형이 무너진 곳으로, 지난 2011년에는 ‘에다 하레디’라는 근본주의 공동체 소속의 과격 단원들이 등교 중인 8세 여아를 학대한 것이 밝혀지며 언론에 크게 보도됐던 지역이기도 하다. 캐나다 출신의 유대인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닐리 필립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길에서 뛰어다녔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개인적으로는 현대적 정통파에 속하지만, 단정하지 않은 차림새로 길을 다녔던 것은 아니다. 늘 머리를 가리는 두건을 착용했고, 짧은 바지를 입었던 적도 없다. 하지만 그저 여자가 길에서 달려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검은 옷의 남성들에게 빼앗긴” 동네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지프차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그곳에는 건물마다 여성은 바지를 입을 수 없으며, 거리를 ‘어슬렁’거려도 안 된다는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걸려있었다. 이미 2015년 법원에서 불법판정을 받은 이 표지판들을 떼어내기 위해 시 당국과 법정공방을 벌이고 있는 그는 이제 더 이상 두건을 착용하지 않는다. “내가 거리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날 도와준 하레디 남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스스로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레디 남성들이 가부장의 역할을 맡길 원한다면 우리를 보호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럴 수 없다면, 내게도 순종적인 여성의 역할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초정통파 유대인 인구가 전체의 11%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이들만이 일상생활 속 종교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유일한 세력은 아니다.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종교적 민족주의자들도 그 원인 중 일부다. 이들은 초정통파와 달리 경전 공부에 매진하지도 않고 세속적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을 하며 국방의 의무도 이행한다. 하지만 신앙의 실천에서 그들이 들이대는 잣대는 날이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다.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딸들에게 하레디파와 동일한 긴 치마를 입도록 강요하고, 학교는 물론 슈퍼마켓이나 보건소, 버스 안에서조차도 남녀분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3) 이스라엘군은 성 평등에서는 꽤 진보적인 기관이지만, 그런 만큼 정통 랍비들에게는 공격하기 아주 좋은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비세속적 병사들에 대해 보초근무나 차량탑승 중에 여병사와 절대 단둘이 동석하지 않고, 여교관에게 훈련 받지 않으며, 혼성전투부대에서도 근무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듯 아자리아 의원의 말처럼 이스라엘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다양한 사회적 계파가 뒤섞여 이뤄져 있고 역진적인 힘도 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바일란 대학의 올리 벤자민 교수는 “일반적으로 도심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지(유럽계 유대인) 여성들의 삶은 외곽지역에 사는 미즈라히 여성의 삶보다 낫고, 미즈라히 여성들의 삶은 팔레스타인인 여성의 삶보다 낫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4) 1990년대 이후 군, 정치, 종교 등의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와 권리가 큰 진전을 이뤘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이들의 삶이 더욱 불안정해진 것도 사실이다. 1997년 정권을 잡기 시작한 리쿠드당은 1985년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긴축재정과 자유화 정책을 강화했는데, 이 시기는 러시아와 에티오피아에서 대규모의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인 공공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급등하던 때였다. 이후 1990년대 중반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면서 이스라엘의 경제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미즈라히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다.(5) 이스라엘이 외교적 문호를 개방하자 빠르게 세계화가 진행됐고 기존의 섬유산업이 과거의 적대국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주로 근무하던 북부 갈릴리 지역의 공장들과 미즈라히 여성들이 근무하던 네게브 지역의 공장들은 대부분 요르단과 이집트 등지로 이전해 갔다. 또한 1차 인티파다 운동이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인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결국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키부츠에서 맡았던 가정부, 간병인, 소작농 등의 일자리는 필리핀이나 태국 출신의 이민자들에게로 돌아가게 됐다. 그 결과 현재 이스라엘 국적의 팔레스타인 여성(이스라엘 전체 여성 인구 중 20%에 해당)의 취업률은 31%로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세속주의 유대인 여성의 취업률인 79%와는 그 차이가 상당하다.
그러던 중 2003년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전례 없는 경기후퇴를 맞게 됐고,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재정부 장관은 보다 심화한 구조 개혁을 단행했다. 결국 정부가 국방강화, 식민화, 분리장벽 건설에 아낌없이 자금을 퍼붓는 동안 사회적 예산은 대폭 감소했다. 이스라엘은 ‘창업국가’라는 이름 뒤로 세계에서 경제 불균형이 가장 심한 국가, 다섯 가정 중 한 가정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국가가 됐다. 페미니즘 운동가인 레비탈 마다는 “이스라엘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이는 유대인 남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건물주나 은행가가 아닌 이상은 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회복지의 붕괴는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세 가지 형태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첫째로 보육제도의 악화다. 육아와 병행하며 파트타임으로라도 일하려면 반드시 보육시설 이용이 필요하지만, 50만 명에 달하는 3세 미만 아동 중 단 20%만이 공공보육시설 또는 정부 지원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는 가족수당 보조금의 감소다. 특히 생활비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싱글맘에 대한 보조금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현재 싱글맘 중 81%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중 1/4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공공부문 일자리의 축소다. 1980년대 초 여성 경제활동인구 중 70%가 공공부문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2013년에는 그 비율이 17%까지 하락했다.
안보우선주의에 뒤덮인 여성의 권리
그런데 한편으로 이토록 상황이 악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베르셰바 벤구리온 대학의 헨리에트 다한 칼레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이스라엘의 초기 페미니즘 단체들은 대부분 중산층 또는 고소득층의 아슈케나지 여성들로 이뤄져 있었다. 특히 유명한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정계나 군 고위직 출신 남성의 배우자이거나 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참모총장 출신이자 거물급 정치인이었던 모셰 다얀의 딸 야엘 다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아슈케나지 여성들은 주로 평화운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정작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아슈케나지 특권층의 인종차별과 부권주의에 고통 받는 미즈라히계의 문제보다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다한 칼레프 교수는 미즈라히 페미니즘 단체 ‘아초티’(‘나의 자매’라는 뜻)에 소속돼 있다. 이 단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서 ‘잊힌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1999년 창설된 곳으로, 이들이 말하는 ‘잊힌 여성’이란 미즈라히 여성들뿐 아니라 에티오피아, 팔레스타인, 베두인 여성들, 그리고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여성들을 의미한다. 다한 칼레프 교수는 설명했다. “정부보조금 삭감에 맞서 일어난 2003년의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것은 아슈케나지계 지식인 여성들이 아니었다. 시위를 처음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 남부 공업도시 미츠 페라몬 시에 거주하는 미즈라히계 싱글맘인 비키 크나포라는 여성이었다.” 파트타임으로 주방일을 하던 이 여성은 정부 보조금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예루살렘까지 200km를 도보로 걸어가며 네타냐후 재정부 장관의 관심을 촉구했다. “오늘날 아슈케나지계 페미니스트들은 종교 분야의 성 평등을 주장하며 랍비가 될 권리나 탈무드를 공부할 권리 따위를 한가로이 요구하고 있다. 반면 미즈라히 여성들은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놓고 투쟁하고 있다. 세계화로 악화한 상황들을 개선하고, 더 많은 교육과 일자리, 거주지, 적절한 지원 등을 보장받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레비탈 마다는 “이스라엘이 군사주의, 민족주의, 식민주의 국가이자 반영구적 전쟁 상황에 놓여 있는 만큼 언제나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안보문제다. 환경, 사회, 페미니즘 등은 앞으로도 부차적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스라엘의 ‘피포위 강박증(Siege mentality)’은 안보가 여성 문제와 직접 충돌할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군대 내 성추행 사건에 형사처분이 이뤄지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2002년 ‘성벽 작전’을 통해 유명해진 오펙 부크리스 준장이 지난해 여성 지원병 두 명을 성폭행해 기소됐으나 그 역시 처분은 대령 강등에 그쳤다. 변호를 위해 나선 게숀 하코헨 소장은 심지어 성경을 내세우며 그를 밧세바를 간음하는 죄를 범했지만 계속 왕좌를 지켰던 다윗 왕에 빗대기도 했다. 레비탈 마다는 “성폭행범이기 이전에 국가적 영웅이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안보 우선주의 때문에 여성 문제가 과소평가되는 또 다른 사례로 가정폭력 문제를 들 수 있다. 테러 위협이 커지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총기를 휴대하기 시작했는데, 그 총구를 배우자를 향해 겨누는 일이 수차례 일어났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2013년 사이 총에 맞아 사망한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33명으로 그중 18명이 여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2013년 페미니즘 단체가 ‘총 없는 식탁’ 캠페인을 벌이면서 가정 내 총기 휴대를 제한하는 법이 상정됐다. 이 캠페인 이후 사망 사건이 잠잠해졌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2015년 ‘무장 인티파다’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정부는 다시금 국민들에게 총기 소지를 권장했고, 국회는 2016년 3월 총기 휴대를 제한하는 법을 수정해 표결에 부쳤다.
한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이 계속되면서 맞고 사는 여성들이 갈림길로 내몰리기도 했다. 특히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이스라엘 국적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경우, 그중 1/4이 2009~2013년 배우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이들 대부분이 경찰에 고발하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는 상황이다. 1994년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금기를 깨고 ‘명예살인’에 반대하는 ‘엘파나(등대)’ 운동을 펼쳤을 때도 이들은 반역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배우자의 가정폭력이나 성추행 문제와 함께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 역시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스라엘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의 자살테러가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날에도 비키 크나포의 200km에 걸친 시위 행군을 보도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얻지 못한 싱글맘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이에 대해, 한나 사프란은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던 해나 이스라엘 사회가 어느 정도 비무장화되던 시기에 여성 문제에서 주요 법적 진전이 이뤄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무장 시기에야, 비로소 안보 이외의 주제를 꺼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이스라엘의 여성해방 운동과 영토점령 반대 운동이 연결돼 있다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나 사프란도 이 두 가지를 따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 아들이 군복무를 결정했을 때, 군복을 세탁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여성의 지위가 향상됐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여전히 모든 것이 정해진 기준만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복무를 하는 여성은 보다 좋은 전문 경력을 쌓을 기회를 얻는 반면, 성범죄에 노출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실제로 2013년 국회 보고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여군 8명 중 1명은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조차도 포기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이스라엘 여성에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로라 랭 Laura Raim
EU 관료들의 이해관계 문제를 감시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리볼빙 도어 워치’(Revolving Door Watch·회전문 인사 감시)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
(1) Amnon Kapeliouk, ‘La décadence des kibboutz israélien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5년 8월.
(2) 세계은행 및 UN인구국의 자료에 따름
(3) Yaël Laer, ‘Israël: le pouvoir maléfique des hommes en noi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3년 1월.
(4) 이스라엘 유대인 중 ‘미즈라히’는 아랍 출신의 유대인을, ‘세파디’는 15세기 스페인에서 추방돼 이주해온 유대인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5) 오슬로 협정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의 자치에 대해 그 일정과 점진적 진행 과정을 결정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