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내 이미지에 대하여
내 본명은 점숙이다
누가 점숙아! 하고 부르면
쥐에게도 새에게도 들켜버릴까 봐
얼굴 확! 달아오르는 이름이다
초가집 부뚜막에 뒤집어놓은 간장종지 같은 이름이다
지금은 나영이란 필명을 주로 쓰고 살지만
어쩌다 내 본명을 알게 된 사람들은
나영이란 이름과 점숙이란 이름
그 간극에서 봉숭아 씨방 터지듯 팟! 웃는다
어떤 사람은 내 이름이 전설의 고향이나
예전에 방영하던 TV문학관에 등장하던 그런 이름이라고
그것도 주인공도 아닌 점순이라고 그리 대충 부르면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기역과 니은 그 받침 하나의 뉘앙스가 얼마나 다른데
점례, 쌍자, 순덕, 말순, 봉자, 언년
세련된 이름들 다 놔두고 어찌 그리 민망하게들 지어놨는지
임신한, 김봉지, 김벌레, 이사철, 오백원, 이성기
이름 하나 바뀐다고 본질이 뭐 크게 달라지겠나 싶겠냐만
말의 결과 이미지가 나를 사육하고 있다
나는 이미지의 포로다
거울 속의 내가 때때로 낯설게 보이는 것은
점숙과 나영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굴절하기 때문이다
고두현, 마음의 액자
멀리 있는 것이 작아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커 보이는
원근법의 원리 이미 배웠지만
세상 안팎 두루 재보면
눈에 멀수록 더 가깝고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요
오늘처럼
멀리 있는 당신
어느 날 문득 내게로 오는 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유리 거울이라면
끊임없이 가 닿기 위해
나를 벗고 비우는 일이
원근보다 더 애달픈 사랑이라는 걸
마음의 액자 속에서
비로소 깨달은 오늘
문정희, 석남꽃
새벽 두 시인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나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요
저녁 때 사거리에서
청담사거리를 묻는 노인에게
그만 봉은사거리를 가리키고 말았어요
그 노인은 지금 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요
청담사거리를 찾다 지쳐
수천마리 귀뚜라미들을 데리고 쓰러져 있을까요
외줄에서 떨어진 줄광대처럼
산발한 어둠속에 떨고 있을까요
정육점의 불빛처럼 충혈된 밤
사방에서 컹컹 내지르는 짐승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람 날리는 자동차들 속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성직자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죽어서도 석남꽃 머리에 꽂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온 신라의 남자처럼
벌써 죽어 아름다운 관에 누워 있을까요
내 불면의 가지 끝에 검은 눈썹 달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고 있어요
세상에는 왜 이리 길을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여보, 나침판과 지도는 모두 어디에 있지요
마경덕, 베껴먹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베껴 먹었고
나는 어머니를 베껴 먹고
내 딸을 나를 베껴 먹는다
태초에 아담도 하나님을 베껴 먹었다
아담 갈비뼈에는 하와가 있고 내가 있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은 하와의 사본이다
금성 목성 토성 화성
모두 지구의 유사품이다
바람개비는 풍차를
국자는 북두칠성을
너훈아는 나훈아를
슈퍼는 돈 한 푼 내지않고
구멍가게를 베껴 먹었다.
귤나무는 탱자나무를
밤송이는 성게를
별은 불가사리를 탁본했지만
한 번도 시비를 걸린 적이 없다
하이힐은 돼지발의 본을 떠서 완성되었다
복숭아는 개복숭아를 표절하고 드디어 팔자를 폈다
아직도 개복숭아인 것들은
눈치가 없거나 지능이 떨어진 것들이다
나는 수년 간 산과 바다를 베껴 먹었다
그러므로 내 시는 위작이거나 모작이다
나는 오늘도 늙은 어머니와 맛있는 당신을 베껴 먹는다
장옥관, 하늘 우물
한때 나는 새의 무덤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다
물고기의 무덤이 물 속에 있고
풀무치가 풀숲에 제 무덤을 마련하는 것처럼
하늘에도 물앵두 피는 오래된 돌우물이 있어
늙은 새들이 거기 다 깃들이는 줄 알았다
피울음 깨무는 저 저녁의 장례
운홍사 절 마당 늙은 산벚나무 두 그루
눈썹 지우는 것 바라보며 생각하느니
어떤 죄 많은 짐승 내 뒤꿈치 감옥에 숨어들어
차마 뱉어내지 못할 붉은 꽃숭어리
하늘 북으로 두드리는 것일까
하르르 하르르 귀 얇은 소리들이 자꾸 빠져들고
죽지를 접은 나무들 얼굴을 가리는데
실뱀장어가 초록별을 물고 돌아 나오는 어스름 우물에
누가 두레박을 던져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