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리, 문득, 노랗다
꽃집 앞에서 문득 그가
참 질기게도 있다
갓 핀 수선 하나 들고 왔다
그를 들고 온 거지
이건 꽃에 대한 경의인가
혹은 결의인가
노란 수선에 마지막 장면이 들어있다
꽃집 앞에서 문득 그가
봉우리까지는 꽃집여자가 피웠다
그러니 꽃이 스스로 피었을 뿐
구근은 나의 결과가 아니다
둥근 뿌리에 쟁여 놓은 고백들
발설하는 게 아니었다
부추긴다고 다 피우지 마라
두근거림이 먼저라
혼자서 둥글게 부풀리는 연애도 마라
내년에도 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여자는 말했지만
내게 와서 꽃은 다 죽었다
그는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몇 번째 죽음인가
노란
자살 같은 색깔 옆에서 묻는다
묻는다
꽃집 앞에서 문득 그가
복효근, 가마솥에 대한 성찰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 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에서
참
삶까지는 멀다
박제영, 뜻밖에
젊은 날엔 시를 쓰기 위해 사전을 뒤져야 했다
몇 번의 실직과 몇 번의 실연이 지나갔다
시는 뜻밖에 뜻, 밖에 있었다
이성목, 꽃, 무화과나무를 찾아서
그대, 꽃다운 나이에 꽃피지 못하고
불혹에 다다른 나를 찾아왔네
불볕처럼 뜨거웠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봄날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네
이미 가지에는 과일이 농하고
나는, 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는 것도
늦었다. 너무, 늦었다
지친 잎들이 붉은 얼굴로 나를 뛰어 내렸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네
꿈에 조차 볼 수 없던 것이 만개였으니
모든 꽃들이 결국 지고 마는 것이라 해도
나는 받아들이려네
세상의 뒷마당 한 구석에 얕게 내렸던
나무뿌리 뻐근하게 힘을 주는 동안만이라도
순간만이라도
이승하, 어머니가 가볍다
아이고
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 공사가 한창인데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척추를 다치신 어머니
받아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
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
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
내 아픈 니를 업고 그때
어무이, 그 얘기 좀 그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
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
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