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 햇빛이 말을 걸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곽재구,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하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낄낄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이윤학, 민들레
민들레꽃 진 자리
환한 행성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가벼운 홀씨들이
햇빛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
머물러 있는 행성 하나
마음의 끝에는
돌아오지 않을
행성 하나 있어
뿔뿔이 흩어질
홀씨들의
여려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는 높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정희, 진짜 시
시가 시라는 것밖에 모르는 내게
어느 날 시가 돌연 다가왔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들하며 시동생과
시고모와 시댁의 권속들과 식솔들과
장엄한 무덤들까지....5대 7대 9대 손의
손의 손손들이
으시시하고 시큼하고 시시콜콜하게
시큰거리며 시시한 시앗들과
씨앗들의 뿌리의 뿌리가
시가 시라는 것밖에 모르는 내게
어느 날 돌연 그 간단한 접두어 하나로
나를 제압해 버렸다
김경선, 길을 걷다가
생을 걸으며
마음의 깊이도 사랑의 결말도
쉬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생의 갈피갈피마다 젖은 풀잎이 무성하고
피고 진 흔적이 난무한 저 길 복판
태양이 진 언덕 위로 서리가 내리고
마른 갈잎도 간직 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발아하지 못한 꽃씨를 품고
몸을 내 던지는 꽃잎,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대지는 겨울 내내 출렁거리는 암내를 풍기는
아, 생이란 것 결국 썩어 발아하는 것
생이라는 슬픈 길을 걸을 때
성에가 낀 창을 후후 불던 꽃잎도
스스로 꽃 피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염려는
어수룩한 눈물바람인 것인데
생이 기막히다는 것, 생이 막막하다는 것
다시 꽃피울 틈을 위해
떨고 있는 긴 겨울의 노래에 불과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