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국, 너에게로 가는 길
너에게로 가는 길엔
자작나무 숲이 있고
그 해 여름 숨겨 둔 은방울새 꿈이 있고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낮은 침묵의 초가(草家)가 있고
호롱불빛 애절한 추억이 있고
저문 날 외로움의 끝까지 가서
한 사흘 묵고 싶은
내 마음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미열로 번지는 눈물이 있고
왈칵, 목 메이는 가랑잎 하나
맨발엔 못 박힌 불면이 있고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강신애, 액자 속의 방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걸린 방
알고 보니 시든 종이꽃이었다
키작은 주인 여자가 방문을 열자
잡다한 생활의 때가 모자이크 된 벽지와
싱크대의 퀴퀴한 냄새
비좁은 복도를 마주하고 세든 세 가구가
공동 화장실을 가다 마주치면
서로 스며야 한다
하루치의 숨을 부려놓고
햇빛 한 줄기에도
보증금이 필요한 세상
모든 희망의 문짝이 떨어져나간 대문을
허둥지둥 나서니
거리의 그 많은 사람들 모두 방이 있다니
아니야, 방은
액자 그림 속에나 있는 것
노숙, 가망 없음
그게 우리 지상의 방이야
생활정보지를 펼쳐 아홉번째 X표를 그리면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걸어다닌
일생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목 부러진 해바라기들이
투둑 발에 밟힌다
최정란, 산벚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잎 지으랴 꽃 빚으랴 바쁜 나무
봄이 주문한 꽃들의 견적서를 쓰고
잎들의 월간 생산 계획을 짠다
가장 알맞은 순서도에 따라
발주 받은 꽃들을 완성한다
납기에 늦지 않게 꽃들을 싣고
좁은 가지 끝까지 빠짐없이 배달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안으로 굳은 옹이를 쓰다듬는 나무
연말 결산은 붉은 낙엽으로 다 턴다
대차대조표에 빈 가지만 남아도
봄이면 다시 꼼꼼하게 부름켜를 조인다
제 몸의 스위치를 올려
가지와 뿌리를 닦고 기름친다
나도 나무공장에 출근하고 싶다
숙련공 아니어서 정식으로 채용이 안 된다면
꽃 지고 난 뒷설거지라도
나무를 거들고 싶다
첫 월급봉투처럼 두근거리며
봄인 나무와 딱 한 번, 접 붙고 싶다
신형식, 철길에 서면 그리움이 보인다
아직도 아른거리는 것들을
모두 추억으로 만들고 마는 철길에 서면
그리움은 종착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지
사람들이 오고 가던 세상 한 가운데서
기적소리는 아직도 그리 서성이고
다 쓰러져 가는 역전 앞 가게에서
박카스 한 병 사서 들이키고 나면
보인다. 그제야 그리움이 보인다
없다. 분명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기억은 그 옛날 그대로인데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리움이다
어쩌면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손잡을 타이밍을 못 맞춘 것이 그리움이다
이제는 가고 오지 않는 비둘기호와 통일호
그리고 기타소리를 생각하는 것이 그리움이다
빈 병 속에서 울다, 울다 떠나버리는 바람처럼
간이역, 누군가 서 있어야 할 그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그리움이다
다 비우고
그렇게 서 있는 것이 그리움이다
철길에 서면 보인다
녹슨 것은
다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