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목포항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 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공광규, 아름다운 사이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시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에서
손톱을 세워 할퀼 일도 없겠어요
손목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어요
신현림,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왜 모든 존재는 사랑인가
그 말없는, 끝없는 대화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그저 그런 한없는 아귀다툼이다
어떤 존재는 속이 빈 무덤
왜 오래된 밀애로
따뜻한 사체를 잉태하는가
이젠 말하기도 싫다
고장난 시계를 풀어두고
네게 끝없이 잡아먹히고 싶다
당신이 티슈에 써준 시를 보며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에
한참 머뭇거린다
그래, 막 구워낸 빵과 식어서
나무처럼 딱딱한 빵은 여전히 빵이다
<피차 사랑하라> 외치며
식은 빵 따순 빵 언 빵이 내게 쏟아진다
하늘에서 땅에서
내 옆구리에서 빵이 구워져 나온다
이천년이 돼도 이천년이 지나도
그 빵을 먹고 처치곤란한 기운을 쓰며
나의 모두에게 애정을 기울여도
외로움은 보험처럼 남을 것이다
당신도 그 누구도 때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고장난 시계를 고치며
사람들의 바다에 가장 아름다운
고래 한 마리 띄울 것이다
원재훈, 섬에서 울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안다
섬이 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것인지
떠나간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백사장에 모래알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스스럼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인지를 안다
섬은 그리움의 모래알
거기에서 울어 본 사람은 바다가 우주의
작은 물방울이라는 것을 안다
진실로 우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은 바다보다도 크다
바다 갈매기는 떠나간 사람의
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서해의 작은 섬에서 울었다
더 이상 발디딜 곳이 없는 섬의 마음을 보고 울었다
그 외로움이 바로
그대가 오고 있는 길이라는 걸
그대가 저기 파도로 밀려오고 있는 작은 길이라는 걸
알고 눈이 시리도록 울었다
밀려와 그대 이제 이 섬의 작은 바위가 되어라
떠나지 않는 섬이 되어라
심재휘, 우산을 쓰다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짝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 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