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 고래는 울지 않는다
연기가 자욱한 돼지곱창집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내들
지글지글 석쇠의 곱창처럼 달아올라
술잔을 부딪친다
앞니 빠진 김가, 고기 한 점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고물상 최가 안주 없이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이 술집 저 술집 떠돌다가
청계천 물살에 떠밀려 온 술고래들
어느 포경선이 던진 작살에 맞았을까
쩍쩍 갈라진 등이 보인다
상처를 감추며 허풍을 떠는 제일부동산 강가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
허공으로 뻥뻥 쏘아 올린다
물가로 밀려난 고래들, 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힌다
새벽이 오면 저 외로운 고래들
하나 둘, 불빛을 찾아 떠날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섬에 닿을 수 있을지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다
스크류처럼 씽씽 곱창집 환풍기 돌아간다
신현림, 아무 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 것도 아니었지
일회용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 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안상학, 도라지꽃 신발
공중전화 부스에서 딸에게 전화를 걸다
문득 갈라진 시멘트 담벼락 틈바구니서 자란
환한 도라지꽃을 보았네 남보랏빛이었네
무언가 울컥, 전화를 끊었네
딸아
네 아버지의 아버지도 저리 환하게 살다 가셨지
환하지만 아주 환하지는 않은 저 남보랏빛 꽃처럼
땅 한 평, 집 한 칸 없이도 저리 살다 가셨지
지금 나도 저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환하지만 아주 환하지는 않은 얼굴로
아주 좁지만 꽉 찬 신발에 발을 묻고 걸어가고 있겠지
도라지의 저 거대한 시멘트 신발 같은 걸 이끌고
네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환한 딸아 지금 내가 네 발 밑을 걱정하듯
네 아버지의 아버지도 내 발 밑을 걱정하셨겠지
필시, 지금 막 도라지꽃 한 망울이 터지려 하고 있다
환하지만 다 환하지만은 않은 보랏빛 딸아
내가 사 준 신발을 신은 딸아
이기철, 시
성공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물살같이 가슴에 아려오는 것 있어 시를 썼다
출세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슬픔이 가슴을 앨 때 그 슬픔 달래려고
시를 썼다
내 이제 시를 쓴 지 삼십 년
돌아보면 돌밭과 자갈밭에 뿌린 눈물 흔적
지워지지 않고 있지만
나는 눈물을 이슬처럼 맑게 헹구고
아픈 발을 보료처럼 쓰다듬으며 걸어왔다
발등에 찬 눈 흩날려도
잃어버린 것의 이름 불러 등을 토닥이며 걸어왔다
읽은 책이 모두 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식이란 부스럼 투성이의 노인에 다가가는 것
앎은 오히려 저문 들판처럼 나를 어둠으로 몰고 갔으니
그러나 노래처럼 나를 불러주는 것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것은 시뿐이다
나무처럼 내 물음에 손 흔들어주는 것은
시뿐이다
고요의 힘인, 삶의 탕약인
강은교, 숲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