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나에게 사랑이란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 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무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함민복, 산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 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도종환,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나희덕,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김인자, 나는 삼류가 좋다
이제 나는 삼류라는 걸 들켜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아니 나는 자진해 손들고 나온 삼류다
젊은 날 일류를 고집해 온 건 오직 삼류가 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삼류 하면 인생의 변두리만을 떠올리지만 당치 않는 말씀
일류를 거쳐 삼류에 이른 사람은 뭔가 다르다
뽕짝이나 신파극이 심금을 울리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편해 오래 입어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낡은 옷 같은 삼류
누가 삼류를 실패라 하는가
인생을 경전(經典)에서 배우려 하지 말라
어느 교과서도 믿지 말라
실전은 교과서와 무관한 것
삼류는 교과서가 가르쳐 준 문제와 해답만으로는 어림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