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강은교, 섬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로 흐르는가
지었네
바다는 왜 사이로 넘치는가
우리여 왜
이를 수 없는가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 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炭)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윤성택, 주유소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김종해, 사라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누구에게나 바람이 불고 비오는 날이 있다
젖을대로 젖어서
슬픔을 슬픔이라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아픔을 아픔이라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세상에 보이는 것 모두
움직이는 것 모두가 그대의 것이 아닌 날
오오, 그대여 기억하라
몸을 태우고 한 줄기 연기만 남긴 사람들을 생각하라
오늘 그대 뺨에 흐르는 눈물만이
재가 되지 않는 사리
그대가 쥐고 있는 한줌 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