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 늙은 선풍기를 위하여
고모님께서 한 십년 쓰시다가
미국 이민 가시면서 물려주신 일제 산요 선풍기가
우리집에 온지도 이십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해마다 여름 맞아 이놈을 꺼낼 때마다
속초 처가 진돗개 진희를 겹쳐보게 됩니다
새끼들 쑥쑥 잘 낳아 퍼뜨리며 한 이십 년 가까이 잘 늙어
웬만한 사람보다 속 깊던
진희의 무심한 듯 검고 깊은 표정을 떠올리곤 합니다
진희처럼 새끼들을 낳지는 못했지만
이젠 이놈도 생을 다해 가는 건지
철사로 된 얼굴에서 세월과 존재의 섭리랄까
일생이라는 것의 한 심연을 언뜻 드러내 보입니다
이젠 바로 일번을 누르면 이놈이
금세 돌아가지 않고 그으응, 하고 신음소릴 냅니다
살살 다뤄달라고, 말을 하게 된 게지요
목덜미의 꼭지를 뽑으면 목이 돌아가야 하는데
디스크라도 걸렸는지 관절 더덕거리는 소리만 내면서
오십견은 내 목덜미며 어깨처럼 삐딱하거나
제멋대로 돌다 서다 하면서 고집을 피웁니다
한번씩 얼굴을 가린 철망을 변검술처럼 훌러덩 벗어버릴 때도 있어
가족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비록 생명 없는 이놈의 물건이지만
이름 하나 붙여줘야 하는 건 아닌지요
신경림, 집으로 가는 길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박재희, 포도가 신문을 읽다
초여름이면 포도가 서서히 익어간다
농부는 포도에 신문지로 만든 봉지를 씌운다
빼곡히 적힌 기사들
푸릇한 포도송이에게도 철지난 신문이 배달되었다
세상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시끄러운 사건들이 포도알에 박힌다
푸른 눈알을 반짝여 본다
기름 냄새에 절은 눈알들
무엇일까 무엇일까
까막눈으로 읽고 또 읽고 달포가 지나
오늘 신문에 자신이 주인공이 된
<**포도축제> 기사가 크게 났다
머지않아 그에게도 사건이 일어날 것 같다
감싸고 있던 신문기사를 북북 찢고
시끄러운 세상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권대웅, 장독대가 있던 집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시를 지나
저녁 여섯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안도현, 도끼
도끼 한 자루를 샀다
눈썹이 잘 생긴 놈이다
이 놈을 마루 밑에 밀어 넣어두고 누웠더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도 드디어 도끼를 가졌노라,
세상을 명쾌하게 두 쪽으로 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살아가다 내 정수리에 번갯불 같은 도끼 날이 내려온다 해도 이제는 피
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내 눈썹이 아프도록 행복하였다
장작을 패보겠다고
이튿날 새벽, 잠을 깨자마자 도끼를 찾았다
나무의 중심을 향해 내리치면 나무는 장작이 되고 장작은 불꽃이 되고 불꽃은 혀가 되고
혀는 뜨거움이 되고 뜨거움은 애욕이 되고 애욕은 고독이 되고
그리하여 고독하게 나는 장작을 패다가 가리라 싶었다
도끼를 다를 줄 모르는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옛적 아버지처럼 손바닥에 침을 한 입 뱉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양발을 벌린 다음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도끼를 치켜들고는
(허공으로 치켜올려진 도끼는 구름의 안부와 별들의 소풍 날짜를 잠깐 물어보았을 것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고요한 세상의 한가운데로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내 도끼는
나무의 중심을 가르지 못하였다
장작을 패는 일은 번번이 빗나가는 사랑하는 일과 같아서
독기 없는 도끼는 나처럼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