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중심
사람의 깊이를 모르겠다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 얼굴이 다르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어떻게 시가 나올까
저렇게 윤기나는 밥상에서 어떻게 소말리아가 보일까
저렇게 멋진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실직자들이 보일까
노을의 실체를 알고부터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열리지가 않는다. 저 삶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패랭이꽃에게 물었으랴
오죽했으며 사람의 깊이를
날아가는 새에게 물었으랴
오늘도 나는 잔가지만 잔뜩 보고 돌아와
꽃병 가득 꽂혀 있는 장미를 들어낸 뒤
꽃병 안만 들여다본다
눈물로 꽃을 키우다니
이재무, 갈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 올리는 것이다
눈 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 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 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 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
정호승, 빈 벽
벽에 걸어두었던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빈 벽이 된 벽이 가만히 다가와
툭툭 아버지처럼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준다
못은 아직 빈 벽에 그대로 박혀 있다
빈 벽은 누구에게나 녹슨 못 하나쯤 운명처럼 박혀 있다고
못을 뽑으려는 나를 애써 말린다
지금까지 내 죄의 무게까지 견디고 있었던 저 못의 일생에 대해
내가 무슨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벽에 걸어놓아야만 벽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내가 벽에 걸려 있어야만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스러져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캄캄한 내 눈물의 빈방에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빈 벽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는 벽이 되었다
김기택, 다리 저는 사람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곽재구,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