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rjkoehler.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5mTSFWUc7ak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육사,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 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매이는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