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그림자도 반쪽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은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라서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신현정, 장마
종일 비 내리고요
텔레비전도 몇 번을 켰다가 꺼고요
팔 쭉 올려 기지개도 켜고요
목도 돌려보고요
그때 옷장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났던 것이다
집 나간 아내가 넣어둔 하마였다
물을 먹고 있었다
난 그만 좀 먹으라고 작작 내리라고
장마야 뒤로 나자빠지라고
물 먹는 하마의 탱탱한 장딴지를 걸고서는 힘껏 밀어젖혔다
글쎄 그게 아니었다
종일 비 내리고요
비 내리고요
양해기, 나무 안에 누가 있다
나무가 흔들린다
나무 안에 누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나무가 흔들릴 수는 없다
누가 내 곁을 떠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나뭇잎들이
한꺼번에
나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재무, 석모도의 저녁
비오는 날의 바다는
밴댕이회 한 접시, 도토리묵 한 사발을 내놓고
자꾸만 내게 술을 권했다
몸보다 마음이 얼큰해져서
보문사 법당에 오르며
생에 무늬를 남긴 인연들을 떠올렸다
비를 품고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저녁 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오는 날의 바다가 쓰는
생의 주름진 문장들을 읽는 동안
마음의 자루가 터져
담고 온 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얼마나 더 큰 죄를 낳아야
세상에 지고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섬에 와서도 내내 뭍을 울고 있는 내가 싫었다
자애로운 저녁은 어머니의 긴 치마가 되어
으스스 추워오는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목필균, 골목길
종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제법 큰 골목이 있다
대형 마트에 밀려 궁색해진
현주네 슈퍼
수입 쇠고기 홍수 속에서
횡성 한우만 고집하는
수준 정육점
기성복 시대에
목숨만 붙어 있는
맞춤 양복점
명절 때나 복닥거리는
경기 방앗간
비타민 어린이집
동현교회
종암 세탁소
은주 옷 수선집
스타일 미장원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오는
칠십 년대 풍경
복 터지는 일보다
속 터지는 사연들이
날마다
골목길로 터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