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무, 고단(孤單)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손 놓겠지만
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
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김금용, 비빔밥
프라이팬에 물 한 잔 놓고 점심을 먹는다
창틈으로 비껴드는 바람밖엔
숨 쉬고 재잘거리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모두가 죽은 오후 세 시 반에
이승훈시인의 비빔밥 시론을 베껴 먹는다
전기압력밥통에서 식혜가 되어가는 잡곡밥과
기제사에서 쓰고 남은 나물들을
된장국물과 김치 조금 섞어 비비다가
마른 김 몇 장과 볶은 깨, 참기름 약간 두르면
비행기 기내음식으로 외국인도 환영한다는
문지방 사라진 웰빙 음식이 탄생한다
클래식과 뽕짝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산문, 그림과 사진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을 구하는 나이와 국경, 성의 구분까지 허물고
오직 눈빛 하나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유의지 아래
이념도 목적도 필요 없어진 디지털 시대에
정해진 요리법이며 트릭도 맛내기도 필요 없는
나만의 식사 나만의 허락된 존재와 몽상 안에서
혼자 꾸역꾸역 비빔밥을 먹는다
허공까지 빡빡 긁어 먹는다
박승우, 국밥집에서
허름한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 먹다보면
그래도 사는 게 뜨끈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장난 시계와 삐걱거리는 의자와
비스듬히 걸린 액자가 다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뜨거운 국밥 한 숟갈 목젖을 데워오면
시린 사랑의 기억마저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도 쓸쓸함도 다 엄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자리 모여 앉아 제각각의 모습으로 국밥을 먹는 사람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낯이 익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주 한 잔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며
구겨진 날들이 따뜻하게 펴지고 있다
반칠환, 구두와 고양이
마실 나갔던 고양이가
콧등이 긁혀서 왔다
그냥 두었다
전날 밤 늦게 귀가한
내 구두코도 긁혀 있었다
정성껏 갈색 약을 발라 주었다
며칠 뒤
고양이 콧등은 말끔히 나았다
내 구두코는 전혀 낫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워도
죽은 가죽은 아물지 않는다
얇아도 산 가죽은 아문다
최문자, 그 해의 꽃구경
그 해
그를 생으로 뽑아낼 수 없어서
생으로 사랑니 하나 뽑아내고 치통을 견디다 못해 꽃구경을 갔었다
토종 흰 민들레 군락지, 제천 구인사
한꺼번에 피를 다 쏟아낸 듯한 핼쑥한 꽃들이
어금니가 보이도록 희게 웃고 있었다
엎드려서 흰 꽃 두 송이 꺾는 사이
피가 한 입 가득 고였다
흰 꽃 위에다 대고
시뻘건 그를 뱉고 또 뱉어냈다
비린 입술을 흰 꽃으로 닦았다
해질녘까지 지혈되지 않는 그를
약솜처럼 물고
하루 종일 그 산을 쏘다녔었다
그 해
그게 꽃구경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