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왕조실록은 일본서기와 별개의 저작 분류를 가진다,
이것은 뭐라고 설명 드려야 할지 참 너무 기초적인 부분이라 오히려 고민이 들기는 합니다만 일단 공신력을 끌어올리기위해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한 사이트의 소개를 발췌해 붙여드리겠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tro/intro_info.jsp
실록 편찬의 유래
실록(實錄)은 황제나 국왕과 같은 제왕이 조정에서 일어나거나 보고되는 일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로서, 일종의 연대기(年代記)에 해당한다. 그 기원은 황제의 측근에서 매사를 기록하던 한 대(漢代)의 기거주 (起居注)에서 시작되지만, ‘실록’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6세기 중엽 양(梁) 무제(武帝) 때 주흥사(周興嗣)가 편찬한 《황제실록(皇帝實錄)》이 처음이다.
(후략)
이번에는 두산 백과를 열어볼까요?
요약 역대 제왕의 사적(事蹟)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
네 사서입니다. 일본서기와 마찬가지인 사서이지요,
2. 위서와 진서의 분류법
일단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http://terms.naver.com/search.nhn?query=%E5%83%9E%E6%9B%B8&sm=&subject=100&mobile
두산 백과의 위서 검색 결과 중 인문 과학만을 소급한 결과입니다.
내용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나의 분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실수 있습니다. 바로 주장하는 작성 시점이 그것이지요,
쉽게 말해 책이 쓰여졌다고 주장되는 시점에 책이 실제로 쓰여졌는가를 두고 결정하는게 위서 진서의 분류입니다.
즉 환단 고기 같이 몇권의 역사서를 엮어 만들어져 몇대에 걸쳐 전해내려왔다고 주장하는 사서는 잘 쳐줘봐야 일제 강점기에 저술된것이니 위서이고 일본서기는 제 아무리 내용이 재기발랄하더라도 신숙주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며 내용을 참조 인용하였던 것을 비릇하여 주장하는 그 시대에 쓰인게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진서입니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면 오파츠 out-of-place artifacts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 시대에 있을수 없는 기술을 가진 유물이라는 것이지요,
즉 만들어 졌다고 주장하는 시기에 나온게 사실이면 진짜이고 아니면 가짜라는 것으로 네브라 스카이 원반이나 안티키테라 기계와 같이 당시 수준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실제로 그 시대에 만들어진게 사실인것은 진품이고, 이카의 돌이나 마야의 수정해골은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뻥쳤지만 현실은 아니라서 가짜라는 것이지요,
진서 위서는 이와 같이 내용이 아니라 작성되어졌다고 주장하는 시대로 구분합니다.
3. 일본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는가,
일본서기의 경우 국내에 부분 부분이나마 번역을 하신분도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건 따로 링크 걸어드리기가 애매하네요,
아무튼 일본서기는 백제본기, 백제기, 백제신찬을 비릇하여, 위서 魏書, 진서 晉書등
한국과 중국의 사료들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게 사실입니다만 이것 어떻게 알았을까요?
간단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사서들에서 하듯이 사서에 인용을 하면서 출처를 남겼거든요, (...)
안그랬다면 이미 존재하지도 않은 사료에서 발췌했다는것을 뭔수로 알겠습니까, 사학자들이 점쟁이도 아니고 말이지요,
더욱 중요한것은 이렇게 인용을 하면서 기년법과 같은 부록까지 얹어 고스란히 가져왔다는 것으로 단순한 존재를 알게해주는 것을 넘어 백제를 좀 더 알게 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당 되는 부분은 해당되는 사서의 본국인 해외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우리가 남의 나라를 가만히 앉아 저절로 알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니까 일본 조정의 기록이나 전승을 비릇하여 사원, 개인들의 기록까지 탈탈 털어 제작을 했다는 사실을 빠뜨리고 생각하면 자국의 기록까지 해외에서 찾았다는 오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4. 그렇다면 일본서기는 왜 내용이 그 따구인가?
아랫 글에서도 밝혔습니다만 외교론적 관점에서 봐야하겠지요, 아 물론 신화시대는 빼고 말입니다.
현실적인 개혁과 삶, 무역의 파트너이자 롤모델이 통일 신라였다면 일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가의 롤 모델은 당나라 였습니다만 이게 될리가 없었죠, 국외의 통일 신라도 감당키 어려운 건 둘째치고 당장 국내만 돌아보더라도 혼슈의 아이누 북부의 에미시 등 쟁쟁한 반군들이 우글거리는 마당에 당나라 처럼 번국을 두거나 하는 일은 요원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게 관념론적 외교관으로 일본서기의 주체를 상대국으로 돌리거나 백제로 잡으면 뭔가 제대로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정부의 정통성과 프로파간다적인 입장에서 저술되어진 일본 서기는 물론이거니와 당나라에 가서도 일단은 번국인 통일 신라를 자신들 보다 잘 챙겨주는 당에 대하여 분노를 터트리거나 통일 신라에 한낮 번국 운운 하며 땡깡을 피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었지요,
뭔가 유치해보이는게 정말 사실입니다만 아이러니 하게 이러한 남자의 가오 잡기(...)는 외교적으로 지금의 북한에서도 쉽게 찾아볼수 있는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만 이 것을 가지고 문자 그대로 삼국은 우리의 번국이었다 운운하는것은 참 뭐한 일이지요, 그래서 임나일본부 설이 일본 자국의 학계에서도 환단고기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