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안도현, 섬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로록 뜬눈 밝혀야 하리
최일걸, 과메기의 길
과메기 붉은 속살 한 점을 쌈 싸먹으면
바닷바람이 서걱거리며 시리게 눈을 찌른다
시큰한 눈물 한 방울이면
껍질이 벗겨진 채 속살만으로
대나무에 눈이 꿰인 꽁치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고광도 서치라이트 불빛에 현혹되어
유압호스에 빨려든 걸 생각하면
굳이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 스스로 눈을 찌르고 싶은 심정일 게다
해풍에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면서
꽁치가 제 속에 열어놓은 벼랑길은 대체 얼마일까
수천 번 벼랑에서 뛰어내려 산산이 부서졌다
저린 살점을 그러모아
벼랑 끝에 다시 서기를 거듭하면서
꽁치는 애통하여 눈물보다 맑고 끈끈한 기름을
뚝뚝 떨어뜨린다
소주 한 잔에 곁들여 과메기를 씹으며
북해도에서 밥상에 이르기까지 과메기의 길을
더듬다보니 나 역시 사무친다
최승호, 북어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었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정희성, 산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