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나는 이내 항복한다
왜 그러냐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물론 나 바쁘다고 대들지도 않는다 절대로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거절하기가 허락하는 일보다 열 배 백 배 어렵다
내가 난장의 터진 길바닥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일순에 순종하는 것은
앞차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을 때
접근 금지의 외마디 소리를
그의 뒤통수를 뚫고 오는 빨간 두 눈을
나는 명령처럼 받는다
돌아다보면 내게도 줄줄이 복종하는 사람들
순하게 나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
달리다가 오죽하면 브레이크를 밟겠는가
곽미영, 휴식
그도 그렇게 누워 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팔공산
동봉에서 서봉으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턱 막으며 길게 누운 그
일생 서 있어야만 하는 고단한 삶을
맥없이 던져버리고
아랫도리 다 드러내고 누워 있다
차마
밟고 넘어갈 수 없는 그 곁을
계곡물이 깔깔대며 지나간다
지금 막 수술실을 나온 아버지
칠십평생 처음으로 오랜 잠에 빠지셨다
파아란 하늘 한 자락 끌어다가
그의 몸을 덮어준다
아버지는 지금 연두빛 꿈을 꾼다
쓰러진 나무의 몸에 꿈틀대는 새순들
아직 먼 봄을 기다린다
깊은 뿌리하나 끈질기게 땅을 붙잡고 있다
윤성학, 2인극
몸살
이것을 하루종일 업고 다니면
나는 하나의 나로만 지어진 것 같지 않다
혼자라면 이렇게 무겁고
무릎이 꺽이고
어깨가 뻐근할 리 없다
업힌 채
내 목을 어떻게나 꽉 끌어안는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내 안에
아픔만을 감당하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오늘도 내가 나를 업고 간다
맹문재, 약수
아프니까, 약수를 찾는다
아프니까 약수를 마시고 약수에 말 걸고 약수와 악수한다
약수를 이해하고 약수를 지지하고
약수 앞에서 반성하고 약수여, 애원한다
약수 뒤에서 나의 졸렬을 인정한다 흰머리를 인정한다 주눅을 인정한다
모가지를 비틀 만큼 증오하려다가 인정한다
명령으로 가리키는 출구를 인정한다
담배를 물지 않고 인상 쓰지 않고 무위로 타협하지 않고
허리 굽혀 약수의 말을 듣는다
반항하지 않고 듣는다 배신하지 않고 듣는다
본디 아팠겠지만
아프니까, 아프니까, 약수를 찾는다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