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식, 벽시계의 얼굴
벽시계를 떼었다
동그란 얼굴이 벽에 새겨져 있다
파리똥도 안 묻은 얼굴로
똑딱이는 심장소리를 두근두근
얼마나 들었는지
금이 가있다
등 뒤에 서있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계를 떼어낸 자리가
창백하다 영정사진
걸었던 곳처럼
슬프다
김행숙, 타인의 의미
살갗이 따가워
햇빛처럼
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뒤돌아볼 수 없는
햇빛처럼
쉴 수 없는 여행에서 어느 저녁
타인의 살갗에서
모래 한 줌 쥐고 한없이 너의 손가락 길어질 때
모래 한 줌이 흩어지는 동안
나는 살갗이 따가워
서 있는 얼굴이
앉을 때
누울 때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김형영, 개구리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의 봄이 올 적마다
새로 물들어 피어오는
개구리 소리
그 소리는 언제나 개골개골 울어대지만
내 앞을 가로막고 울어대지만
나는 네게로 갈 수가 없다
그저 네 소리 그리며
어디로
어디로
걸어갈 따름이다
김기택, 한가한 숨막힘
조심조심 노인이 걷고 있다
눈앞에서 널찍하고 평평하던 길이
발밑에서 외줄처럼 흔들리며 좁아지는 걸음을 걷고 있다
구겨질까봐 슬금슬금 양복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최대한 작고 곱게 만든 걸음을 걷고 있다
중간에 있는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걷고 있다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면 길이 흔들리고 중심이 무너질까봐
갈비뼈 위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목 대신
눈알만 가만가만 돌아가는 걸음을 걷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이
무례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걸음은 파닥거리는 몸을 붙잡고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걸음에 연결된 모든 관절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죽음
동작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자라온 죽음이
있는 힘을 다해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고 있다
성선경, 그믐
그믐은 지퍼를 잠근 입
믐 하고
입 두 개가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 없이 쭉 지퍼를 잠근 입
달도 없는 밤을
아버지는 얼굴로 말했다
늘 빡빡한 살림에
이자가 이자를 낳는 그믐
호롱불도 없는 저녁상을
말없이 물리고 나면
별빛같이 담뱃불만 반짝거릴 뿐
무겁게 입을 닫고
믐 했다
나는 아직도 그믐이 되면
달도 없는 하늘이 불쌍해져
믐
입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