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googifs.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5Av9aMRcdi8
김대규, 몇 몇
어떻게 살아왔는지
몇 몇 일 빼고는
점 .점. 점 잊혀진다
많은 사람 만났는데
몇 몇 이름 외에는
아물아물 잊혀진다
책도 열심으로 읽었는데
몇 몇 밖에는
시도 열심으로 썼는데
몇 몇 밖에는
그 몇 몇들이
바로 내 인생이다
아직 꿈은
몇 몇 남아 있다
그게 나의 남은 생이다
윤성택, 외출
햇볕이 유리창에 착 붙어
온기가 전해지는 아침
노인은 무릎에 파스를 붙이며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고무줄로 묶인 파스다발이
약상자에서 솔솔 냄새를 낸다
우표 한 장의 힘으로
편지가 배달되듯
파스 한 장의 힘으로
가뿐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월의 내력이 적혀진 몸에
겉봉 같은 외투를 걸치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어쩌면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그리움을 봉하고 제 몸에
우표를 붙였는지 모른다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고
대일파스 후끈후끈하게
붙은 봄날, 환한 골목에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다
이규리, 폐허라는 것
허물어진 마음도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도 너의 폐허가 되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겐가 한 때
폐허였다는 것, 또는
폐허가 날 먹여살렸다는 것
어떤 기막힌 생이 분탕질한 폐허에 와서
한판 놀고 가는 바람처럼
내 놀이는
지나간 흔적들 빠꼼히 들여다보는
쌈박한 도취 같은 것
콜로세움은 폐허가 아니었고
상처가 아니었고
먼 훗날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가
할애비의 놀이터를 구경하라고
날 무딘 칼로 뚜껑을 썰어 연
단
면
도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기철, 속삭임
아파트의 굴참나무에 날아온 새
아침 길목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발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날아가지 말라고
오래 거기서 날개를 쉬라고
새의 눈에 비친 하늘
구름 한 송이
새는 나에게 말한다
어제는 산에서 잤다고
숲은 따뜻했다고
인간의 마을은 편안하냐고
아이들은 어제보다 키가 컸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