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미, 겨울산
절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을 정수리에 이고 가부좌 틀면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영하의 묵언수행
폭포는 성대를 절단하고
무욕의 은빛 기둥을 곧추세운다
온몸이 빈 몸의 만월이다
서정춘, 텅
범종이 울더라
벙어리로 울더라
허공에서
허공에서
허공은
벙어리가 울기 좋은 곳
허공 없으면
울 곳 없으리
함민복, 공터의 마음
내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이름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 들어
아직은 만선된 당신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다오
나호열, 타인의 슬픔 1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주경림, 큰 가시 하나 남기고
청어 구이를 먹는다
검푸른 등껍질 밑에서 은백색 뱃살까지
발라먹다가
그 많은 가시들을 다 골라낼 수 없어
잔가시들은 더러 삼키기도 했는데
가시 한 개가 목구멍에 걸렸다
어머니 말씀대로 밥 한 숟가락 담뿍
목이 메어져라 넘겨본다
밥 한 술에 떠밀리어 가시가 넘어간다
나는 밥 한 술의 힘을 신봉한다
송곳으로 찌르는 말
피할 수 없게 달겨드는 운명의 서슬이며
원인을 알 수 없이 욱신거려오는 편두통도
모두 밥 한 숟가락으로 꿀떡꿀떡 잘도 삼켜 왔다
이제, 큰 일 한 가지 남았는데
그새 내가 억센 가시로 자라버려
나를 통째로 삼켜버려야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