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무단횡단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김륭, 꽃의 재발견
새봄, 누군가 또 이사를 간다
재개발지구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야 코딱지 후비며 고층아파트로 우뚝 서겠지만
개발될 수 없는 가난을 짊어진 양지전파상 金만복 씨도 떠나고
흠흠 낡은 가죽소파 하나 버려져 있다
좀 더 평수 넓은 집을 궁리하던 궁둥이들이 깨진 화분처럼 올려져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작은 밑거름도 될 수 없는 똥 덩어리들
꽃을 먹여 살리는 건 밥이 아니라 똥이어서
공중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로 머리띠 동여매고 뭉개진 발자국들이
궁둥이 두들겨 꽃을 뱉어낸 거지
언제부터일까 버리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
푹신푹신했던 소파가죽 찢어발기고
툭, 튀어나온 스프링
누군가 버림받은 곳에서만
꽃은 핀다
김추인, 길
문을 나서면 문득
지도보다 먼저
길이 내 곁으로 다가서며
너 어디 갈래? 묻는다
못 들은 척 호주머니나 뒤적뒤적 딴청이면
그래그래그래
길이 그냥 길을 내준다
슬픈 날은 슬픔 쪽으로
쓸쓸한 날은 길도 안 난 산기슭
아직 읽어내지 못한 내 이승의 끄트머릴
힐끗 보여주기도 하면서
억새바람 뒤로 희끄무레 돌아도 가면서
그래그래그래
끄덕이며 길을 내준다
수신된 메세지 하나 없이
억수 쏟아지고 사무치는 날
문 밖에 서면
너 어디 갈래? 묻지도 않고
젖은 골목길이 허청허청 따라온다
구부정한 그의 어깨도 흐림이다
이영광, 의자
앉아 있는 사람의 몸 아래에
어느 새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사람
의자는 먼 곳에서 쉼 없는 네 발로
삐걱삐걱 걸어 여기 왔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다정하고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안현미,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귀퉁이가 닳고 닳은 통장
지출된 숫자와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 없어도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고향 집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같이 붉은 도장밥 먹으며
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
상처도 밥이고
가난도 밥이고
눈물도 밥이고
아픔도 열리면
아픔도 열매란다, 얘야
까치발을 딛고 나 엄마를 따먹는다
내 몸 속에는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