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전 고양 원더스 감독 《 이달 초 한 야구 이벤트 전문 사이트가 ‘가장 모셔오고 싶은 감독’을 주제로 설문 조사를 했다. 전직 프로야구 감독 9명 가운데 1위는 김성근 당시 고양 원더스 감독(72)으로 59%의 지지를 얻었다. 2위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11%)의 5배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이었다. 공교롭게도 며칠 뒤 김 감독은 실업자가 됐다. 독립구단이던 원더스가 전격 해체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당장 ‘FA(자유계약선수) 1순위’ 감독으로 떠올랐다. 몇몇 구단이 접촉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강연하기 위해 대전에 간 그를 본 야구팬이 “한화와 만난 것 같다”며 올린 글은 하루 만에 조회수 1만 건이 넘었다. 반면 영입 주체로 거론된 구단 관계자들은 “시즌도 안 끝났는데 김 감독이 ‘자가발전’을 하고 있다”며 거리를 둔다. 한발 더 나아가 “구단 사장들이 ‘김 감독은 안 돼’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요약하자면, 팬은 원하는데 구단은 원치 않는다. 야구 지도자 가운데 그만큼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을까. 김성근 감독을 만나 ‘반(反)김성근 정서’에 대해 물었다. 》
가는 곳마다 마찰… 돈도 밝힌다?
김 감독은 1984년 OB를 시작으로 2011년 시즌 도중 SK에서 물러날 때까지 프로 구단만 6곳을 거쳤다. 그는 “아마추어 야구와 원더스까지 포함하면 13번째 해고”라며 명쾌히 정리해 줬다. 성적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불러주는 곳이 없었을 테니. ‘만년 꼴찌’ 쌍방울은 그가 부임한 1996년 정규시즌 2위의 돌풍을 일으켰다. 2001년 35경기를 치렀을 때 2할대 승률이던 LG는 그가 감독대행을 맡은 98경기에서 6할 가까운 승률을 기록했다. 전년도에 6위였던 SK는 그가 오자마자 우승컵을 안았다. 김 감독을 내보낸 구단들은 그의 성격을 거론한다. 고집불통에 혼자만의 야구를 한다는 것이다. 김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
“나를 싫어하는 구단이 많다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웃음). 몇몇 구단에 있을 때는 시즌 도중 ‘칼’이 나를 겨누고 있는 걸 알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성적을 내야 했으니까. 리더(김 감독은 종종 일본어 ‘오야’로 표현했다)는 바깥의 소리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코치, 선수, 구단 직원들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사장들과 싸웠다고? 당하면 당했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얘기가 나왔을까. 그건 사장이 나를 손아귀에 넣으려 하는데 내가 따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회사를 보자. 사람을 뽑을 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채용한다. 구단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뽑았을 것 아닌가. 데려 왔으면 살릴 생각을 해야지…. 중요한 건 구단의, 구단주의 목표다. 사이좋게 지낼 감독이 필요한 건지,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건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누구는 ‘김성근 얘기 다 들어주면 구단 운영 못 한다’고 언론에 얘기하고 다녔다. 이상한 거 요구한 적 없다. 전지훈련 때 선수 최대한 많이 데려가고 싶다 했고, 야간에 훈련할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걸 힘들게 여기는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내가 고집불통이라고 하는데 나도 필요할 땐 변한다. 2006년 일본 지바롯데에 있으면서 마케팅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경기 승부만 중요하게 여겼다. SK에서는 선수들에게 팬 서비스를 강조했다. 사인 안 해주고 사진 촬영 거부하면 벌점을 줬다. 그런 선수단 규정을 만든 감독은 내가 처음일 것이다.”
김 감독이 프로야구를 떠난 뒤 설(說)이 난무했다. 연봉 액수에 집착하고 법인카드로 억대의 판공비를 쓰는 등 돈을 밝힌다고…. 이에 대해 그는 “계약할 때는 돈에 매달렸다. 그게 나의 가치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돈에 집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때 김 감독을 보좌했던 직원은 “감독님이 법인카드를 받은 적이 없다. 판공비도 액수가 적었다. 전지훈련을 가면 개인 돈을 써서라도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챙겨주는 사람이다. 프런트가 내야 하는 비용도 감독의 개인 돈으로 처리할 때가 많았다. 돈에 대해서는 부끄럼이 없는 양반”이라고 말했다.
팬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를 ‘야구의 신’으로 여기는 쪽도 많지만 폄훼하는 팬들도 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요약하면 ‘김성근 야구는 재미없고, 지저분하다’는 것이다. 매일 타순을 바꾸고, 큰 점수 차로 앞서 있는 상황에서도 번트를 지시하고, 투수를 교체하고…. 구단과의 불화설에 대해 “싸운 적이 없다”며 해명을 했던 김 감독이지만 자신만의 야구 스타일에 대해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인간, 욕먹는 것 싫지만…
“야구의 묘미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투수가 잘 던지면 이기는 게 당연하다. 못 던져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진정한 야구다. 그러려면 숨어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건 반복된 연습과 훈련을 통해 만들 수 있다. (테이블에 있는 컵을 들어 보이며) 컵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야구도 팀마다 다르다. 그 팀 살림살이에 맞는 야구를 해야 한다. 쌍방울이든 SK든 그 팀에 맞는 방식이 있다. 성적이 나쁘면 관중은 야구장을 찾지 않는다. 2006년 33만 명이던 SK 관중은 내가 부임해 우승하던 해 65만 명으로 증가했다. 나중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성적이 좋으니 그런 것이다. 나보고 잔인하다고 하는데 5, 6점 앞선다고 방심하다 5-4, 6-5로 이기면 손해다. 전력을 최대한 아끼고 이겨야 장기 레이스에서 우승할 수 있다. 기업 가운데 경쟁사 봐 주라고 하는 곳 있나? 그러다 우리 회사가 쓰러진다. 야구는 왜 봐 줘야 하나. 이길 때는 악착같이 이겨야 한다. 확인하고 또 확인 사살해야 한다. 일단 점수를 먼저 뽑고 도망가야 한다. 이러다 보니 진 팀 팬들이 나를 많이 욕했다.”
김 감독은 SK에 있던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국내 프로야구의 3대 인기 팀 ‘엘롯기(LG-롯데-KIA)’를 상대로 0.736의 승률을 기록했다. 리드를 잡은 뒤의 승률은 무려 97%에 달했다.
“나도 인간이라 욕먹기 싫다. 내가 욕먹으면 가족들이 아파하고 슬퍼한다. 자식들이 죽고 싶다고도 했다. 아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하지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다 보면 팀이 망가진다. 자식들이 울고 있어도 못 본 척했다. 나도 가슴이 아프지만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다.”
나이 따지지 말라, 열정을 따져라
2011년 시즌 도중 그가 물러나자 SK 팬들은 조직적으로, 거세게 구단에 항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잦아들었지만 ‘김성근 경질’은 그해 프로야구 최고의 사건이었다. 3년이 넘었지만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얘기하다 김 감독이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SK가 나를 보내준 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고마워. 계속 프로야구에 있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없었을 거야. 원더스에서는 프로에 있을 때보다는 시간이 많이 났다. 강연을 하며 그전에 못 만났던 세상 사람들을 만났다. ‘야구인 김성근’ 얘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자부심을 느꼈다. 과거에 운동선수라고 하면 무식하다, 깡패다 뭐 이랬는데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불러주니 기분이 좋았다. 강연을 300회 정도 했다. 기업체에 많이 갔고 검찰에 간 적도 있다. 서울대 경영대생들이 ‘강연 듣고 싶은 명사 1위’로 뽑았다기에 어쩔 수 없이 거기도 갔다(웃음).”
최근 한 인터넷 매체는 김성근 영입설에 대해 “할아버지 가신 뒤에 영감님을 부를 일이 있나”라고 했다는 프로야구 한화 구단 직원의 얘기를 전했다. 김 감독은 이 기사를 보고 대단히 화가 났다고 했다.
“나는 나이 얘기하는 걸 싫어한다. 나보다 스무 살이 젊어도 사상, 의욕, 열정이 부족한 사람이 많다. 나는 지금도 훈련할 때 펑고(수비 연습을 하도록 배트로 공을 쳐 주는 것)를 2000개 한다. 프로는 살기 위해 일 하는 게 아니라 일 하기 위해 사는 거다. 일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야 한다. 젊은 감독들도 훈련시키는 것은 나를 못 따라 올 거다.”
프로는 일하기 위해 산다
김 감독은 최근 3년 동안 시즌 도중 한화와 LG로부터 총 3차례 (감독) 제의를 받은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요청이 왔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 구단 중에 구체적으로 제의를 한 곳은 없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감독을 했지만 누구에게 시켜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연락 없다고 초조해 한 적도 없다. 늘 상대가 내게 다가왔다. 또 다른 독립구단이든 리틀야구 팀이든 프로가 아니라도 나는 그라운드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프로야구를 보면 뭔가 변화를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팬들 10명이면 10명 모두 요즘 야구 재미없다고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프로야구 감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물건이다. 필요하면 사고, 필요 없으면 안사면 된다. 먹지 말라고 해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 구단마다 상황이 다른데 남의 구단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건 난센스다.”
한 야구인은 “반(反)김성근 정서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함께 하자니 마음대로 하지 못할까봐, 다른 팀에 뺏기자니 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모든 구단이 ‘반김성근’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젊을 때 별명은 ‘반(半)쪽발이’였다. 우리말이 서툰 그에게 주변에서 대놓고 한 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일교포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런 한(恨)이 그를 독하게 만들었고, 그런 편견이 그를 시기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야구의 신’, 김성근이라는 ‘물건’이 시장에 나왔다. 다음 시즌에는 ‘김성근의 야구’를 다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