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랑, 아름다운 동행
아침 새소리보다 부지런한 아버지와 그분은
새벽별빛을 이고 나갔다가 달을 지고 돌아왔다
땡그랑 땡그랑 워낭소리에 서서히 동이 트는 완식골
문서 없는 그분 땅은 오만 평
가문의 족보에도 없는 그분이 찹쌀죽을 게 눈 감추듯 드시고 나면
보리밥 고봉으로 먹은 아버지는 상전을 모시고 들에 나갔다
한 번도 앞서 간적 없는 아버지
그분의 걸음에 맞춰 평생을 살았다
보릿고개에서 만난 장대비에도 그분의 양반걸음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몇 해 전 방울소리 들으며 아버지가 완식골 지나 종산으로 가신 뒤
생전의 힘이었던 그 분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오늘 제사상엔 쇠고기 한 점 올리지 않았다
해마다 보리밭은 초록이고 자운영 꽃밭 붉은데
두 분이 떠난 뒤
고향집도 외양간도 텅 비어 있다
나석중, 느티나무
괜찮다
몸 한구석에 귀뚜라미가 울어도
보이지도 않는 귀뚜라미는 왜 와서 우는지
요즈음 보이지도 않는 아들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 때
나는 깜짝깜짝 뉘우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나에게 서운한 때 많았을 것이라고
그러니 아들아 너는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게 철부지 해 가는 이 느티의 심사
너도 일가를 이룬 나무, 몰아치는 비바람 잘 견디며
귀뚜라미처럼 괜히 와서 우는 일 없도록
해가 짧아지면서 오른쪽 무릎에서 악기 소리가 나지만
몸이 알아서 현 한 줄 심심치 않게 튕겨주는 일
이제 뼈가 닳고 가슴이 바트는 일도
괜찮다. 괜찮다
강형철, 변명, 멸치
멸치똥이 아니라 멸치 속이여
그게 실은 멸치 오장육부라니까
오죽 속상했으면
그 창자가 그 쓸개가 그 간땡이가
모두 녹아 꼬부라져 시꺼멓게 탔을까
푸른 바다를 입에 물고 헤엄치던
그 생생한 목숨
가마솥에 넣고 끓여대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햇볕에 말려
더 이상 오그라들 것도 없는 몸
또다시 끓여 국물을 내고
너덜너덜한 몸통은 걸러 버리는
그 신세 생각하며
속이 다 꼬실라진 것이란 말이여
똥이 아니라
멸치 속이라니까
다 우려먹는 멸치 마음이라니까
전태련, 오타
컴퓨터 자판기로
별을 치다 벌을 치고
사슴을 치다 가슴을 친다
오타 투성이 글
내 수족에 딸린 손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마음은 수십 번 그러지 말자 다짐하지만
남의 마음같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오타
어찌하랴
어찌하랴
입으로 치는 오타는
여지없이 상대의 맘에
상처를 남기고 돌아오는 것을
한번 친 오타 바로잡는 일 이틀, 사흘
그 가슴에 흔적 지우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 닦아야 할지
숱한 사람들 맘에 쳐날린 오타들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여전히 비뚤어진 채
못처럼 박혀 있을 헛디딘 것들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오타가 아닌가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는가
곧은 길 버리고 몇 굽이 힘겹게 돌아치진 않았는가
돌아보면
내 삶의 팔 할은 오타인 것을
김수영, 은화(隱畵)
인적 없는 습지에 갔다
수초 무성한, 깊은 곳에
잠이 없는
큰 메기가 살 것 같은 습지
잿빛 왜가리가
탁한 물속을 보고 있다
물이 흐르는 쪽으로
굽은 그림자, 외다리로 선 발목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것들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
단단한 바닥이 된다
마음속을 휘젓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슬픔만이
눈앞을 흐리게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