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중, 따뜻한 고요
오래된 뒤주 위가
보기 좋다
꽃병에 꽃이 웃고 있어
꽃도 꽃병도
서로 좋아하고 있어
그 아래 다듬잇돌 위
나란한 다듬이 방망이 두 짝
건네 오는 눈빛 다정하다
뒷전에 물러 앉아
그런 말 없는 것들의
말 없이도 소곤거리는 것들의
주인은 따로 계시면서
보이지 않는 고요가
따뜻하다
김금하, 거미
집 한 채
허공에 떠있다
허방에 걸린
저 얇디얇은
투망에
목숨이 걸려있다
바람이 철썩
삐거덕
집 한 채 출렁인다
아찔하다
산다는 게
안상학, 아버지의 검지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번 한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한미영, 식혜
엿기름물에
잠긴 밥알들이
속속들이
몸을
삭히고 있다
저
편안한
소멸의 풍경
나도
잘 삭혀진 밥알로
가볍게
세상 속을
떠다니고 싶다
누군가의 가슴 한켠에
잘 발효된
한 그릇
시원한 식혜로
남고 싶다
윤성학, 뼈아픈 직립
허리뼈 하나가 하중을 비켜섰다
계단을 뛰어내리다가
후두둑
직립이 무너졌다
뼈를 맞췄다
삶의 벽돌이야 한 장쯤 어긋나더라도
금세 다시 끼워넣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유충처럼 꿈틀대며 갔던 길을
바로 서서 걸어돌아왔다
온몸이 다 잠들지 못하고 밤을 새워 아프다
생뼈를 억지로 끼워 넣었으니
한 조각 뼈를 위하여
이백여섯 뼈마디마디가
기어코 몸살을 앓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