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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식민지화 과정 - 4
게시물ID : history_171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18
조회수 : 132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19 17:50:55
 
 
1862년, 1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상황은 일단 일단락 된 것으로 보였지만 당연하게도 사덕제(嗣德帝)는 조약의 굴욕적인 내용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사덕제는 완(阮) 왕조 측 협상대표로 보낸 반청간(潘淸簡)을 협상에 관한 것들을 모두 위임하는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보냈던 것인데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 내기는 커녕 죄다 굴욕적인 내용들만 가득한 조약을 맺고 왔으니 기가 막혔던 것이죠.
 
물론 반청간도 그런 굴욕적인 조항들에 항변하며 한달 동안 시일을 끌었지만 협상 테이블에서 너무도 유리한 위치에 있던 프랑스의 요구에 못이겨 그리 되었던 것이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치욕스러운 협상을 하게 되었으니 사덕제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졌겠지요. 조항들 중 사덕제가 가장 못마땅해 했던 부분은 남부 베트남의 동부 3성(省) 할양으로, 다른 건 몰라도 영토를 떼다 주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사덕제는 이에 대해 항의하고자 할양한 동부 3성의 반환교섭을 목적으로 1863년, 프랑스 본국으로 반청간을 대표로 하는 외교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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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파견된 외교 사절단. 앞줄 중앙의 인물이 반청간입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베트남 외교 사절단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알현하고 불평등한 조약에 항변하며 동부 3성을 다시 반환해줄 것을 요구합니다만 이를 들어줄리 만무했던 프랑스 측에서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며 협상은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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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를 알현하는 베트남 외교 사절단.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대신에 반청간과 사절단은 프랑스의 근대화된 시설들을 시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는데요, 공장이나 조선소, 증기 기관차 등 유럽의 근대화된 문물들을 접한 사신단은 상당한 컬쳐쇼크를 받습니다. 특히 반청간은 증기 기관차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며 이후 베트남으로 돌아간 후 사덕제에게 증기 기관차를 언급하며 유럽의 선진기술에 대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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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협상에 실패한 사절단은 귀국했고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반청간은 사덕제에게 프랑스에서 자신이 목격한 프랑스의 근대화된 시설들과 선진기술들의 경이로움에 대해 설명하며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전반부에 걸친 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점진적으로나마 서구기술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건의합니다만 사덕제는 베트남인들의 도덕성과 윤리 등과 같은 정신적인 힘만이 프랑스의 침략에 맞설 수 있다는 괴랄한 말만 늘어놓으며 되려 반청간을 디스하고 면박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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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덕제(嗣德帝).
 
 
프랑스의 침략 따위는 정신적인 힘으로도 격퇴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덕제이긴 했지만 자기도 그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지 힘으로 그토록 목매던 동부 3성을 되찾고자 은밀하게 당시 동부 3성에서 활동하던 반란세력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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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1859~1862)으로 표시된 영역이 제1차 사이공 조약으로 프랑스에 넘어간 동부 3성, 즉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식민지이고 초록색(1867년)은 서부 3성(省)입니다. 동부 3성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베트남인들의 반란과 게릴라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사덕제는 서부 3성을 통해 동부 3성의 반란세력을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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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함을 공격하는 완충직(阮忠直)이 이끄는 게릴라 세력. 이 완충직이라는 사람도 훗날 식민통치에 맞선 위인으로 추숭되었습니다.
 
 
그 무렵 동부 3성에서는 완충직(阮忠直)과 같은 반란세력이 계속해서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고 나중에 사덕제는 조정의 신하를 지휘관으로 파견하는 등, 아예 대놓고 반란세력을 지원하며 코친 차이나 식민지의 전복을 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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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3성, 즉 코친 차이나에서의 반란세력을 지원하여 동부 3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사덕제였지만 이는 되려 역효과를 불러왔습니다.
 
한편 프랑스는 코친 차이나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기는 했지만 베트남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총독은 두되, 직접적인 통치는 베트남인 통치자에게 위임하는 식으로 간접통치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방식도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되려 반란만 점점 빈번해지고 격화되어가자 이에 꽤나 골머리를 썩히던 중 반란세력이 인접한 서부 3성에 근거지를 두고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당연히 프랑스에서는 완 왕조에 지원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며 코친 차이나 내부에서의 반란이 종식되지 않을 경우 필요에 따라 반란세력의 근거지이자 지원을 받는 서부 3성을 침공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렸고 완 왕조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1867년, 경고한대로 서부 3성을 침공하여 점령해버립니다.
 
사실 프랑스가 서부 3성을 침공하여 점령한 배경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들끓는 반란의 뿌리를 뽑기 위함도 있었지만 서부 3성이 1863년 무렵 보호령으로 삼은 캄보디아와 코친 차이나 식민지 사이에 껴서 번거로웠던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위에 첨부한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서부 3성은 캄보디아와 코친 차이나 사이에 위치해 있지요. 이도저도 아니게 베트남 영토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거슬렸던 것입니다. 물론 어차피 동남아시아 전체를 식민지화 해나가려던 프랑스 입장에서는 뭔 구실을 대서라도 나중에 먹든 지금 먹든 언젠간 먹을 땅이긴 했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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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 3성에 파견되어 태수로서 통치하던 인물은 지금까지 여러 번 나온 반청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서부 3성의 통치자로서 사덕제의 뜻에 맞춰 동부 3성 내의 반란세력을 지원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1867년, 프랑스가 서부 3성 침공을 단행하자 항전합니다만 나날이 불리해지는 전황에 좌절, 휘하 관료들과 가족들에게 프랑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내용과 서구의 막강한 무기에 대해 주의하고 경고하며 절대 서구 오랑캐들과의 화친은 있을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반청간의 자살로 최후로 항전하던 영륭(永隆 : 베트남어로는 빈롱)성도 머지않아 함락되었고 서부 3성도 프랑스에게 넘어가니 이것으로 완 왕조는 남부 6성을 모두 상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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